오너 일가라도 실력이 안 되면 뺀다 … 머크 가문 130명 중 경영진은 2명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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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학·제약사 머크는 344년을 이어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기업이다. 이 회사 프랑크 스탄겐베르크 하버캄 회장이 7일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350년 가까이 존속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한국머크]

“주주인 가족의 이익보다 기업가치에 우선순위를 둔 결과 340여 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독일 화학·제약 업체 머크의 프랑크 스탄겐베르크 하버캄(64) 회장이 밝힌 머크의 장수 비결이다. 하버캄 회장은 7일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수익을 회사에 재투자하는 것이 지속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주주에 대한 배당을 최소화하고 미래 성장을 위한 재투자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그는 빠르게 재편되는 시장에서 한 기업이 350년 가까이 성공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을 담은 『머크 웨이』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방한했다.

 머크는 166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남쪽의 담스타트에서 ‘천사약국’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344년 동안 줄곧 의약과 화학 부문에서 멈춤 없는 성장을 유지해 왔다. 좀 더 특이한 점은 머크 가문이 13대째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머크 가문 130여 명이 7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 30%는 기관투자가와 소액주주들이 갖고 있다. 원래 100%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1995년 신규투자 확대를 위해 30%의 주식을 상장했다.

 머크 가문의 사위가 되면서 집안의 일원이 된 하버캄 박사는 현재 ‘머크 파트너 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주회사 머크를 경영하는 최고경영위원회를 감시하고 조언하는 역할이다. 표면적으로 감시와 조언에 국한되지만 신규사업 투자 여부를 결정하고, 경영진을 선임·해고하는 권한까지 갖고 있다.

 그에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배경을 물어봤다. 하버캄 회장은 “1920년대 들어 고위급 경영인을 외부에서 영입했는데, 가족 내에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모두 충족하는 데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현재 머크 가문 출신 중에 머크에서 일하는 것은 나와 사촌 2명뿐”이라고 말했다. 나머지는 전부 전문경영인이다. 머크 가문이 이 회사에서 일하려면 다른 기업에서 경력을 쌓아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면 고위급 임원으로 들어올 수 있다.

 130여 명 머크 일가는 각각 5% 이내의 지분을 갖고 있다. 확실한 대주주가 없다 보니 간혹 가족 간에 이견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의견일치를 볼 때까지 대화를 거듭한다고 하버캄 회장은 전했다. 하버캄 회장은 또 “젊어서 자동차를 사고 싶으면 자신이 직접 돈을 벌어서 사야 한다는 것 역시 머크만의 가풍”이라고 소개했다.

 머크가 오랜 세월을 가족 기업으로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독일식 상속 제도가 한몫했다고 했다. 하버캄 회장은 “독일 정부가 과도한 상속세로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는 사태를 막아줬다”고 했다. 지분을 물려받으면 보통 10%에 해당하는 상속세가 부과되지만, 상속 이후 10년간 고용이나 총임금을 현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하면 상속세가 유예되는 조항이 있다는 설명이다. 10년간 약속을 지키면 아예 상속세가 면제된다.

 현재 한국에서 재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 않다는 데 대해 그는 “가족기업은 독일 총생산량의 80% 정도를 담당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며 “기업의 이익을 주주가 빼가지 않고 최상의 사업에 재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지배구조의 유형에 특별한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머크  신약개발과 액정화면(LCD) 원료, 생명과학, 기능성화장품 원료 및 안료사업을 한다. 지난해 103억 유로(약 14조원) 매출을 올렸다. 67개국에 185개 지사가 있으며, 총 임직원 수는 4만여 명이다. 한국법인은 머크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린다. 삼성과 LG에 LCD용 원료를 공급하면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한국에 140억원을 투자해 첨단기술센터를 설립했고, 지난해 10월에는 독일 본사 이외의 국가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애플리케이션 연구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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