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 돈이 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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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미국 경제에 돈이 도는 조짐이 보인다. 최근 민간 부문 경기회복의 바로미터인 주택과 자동차, 신용대출 부문 등에 은행들이 돈을 풀기 시작했다. 가계와 기업도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에서 벗어나 다시 돈을 끌어 쓰고 있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며 자금을 적극 풀었지만 돈의 흐름이 은행에서 멈춰 민간으로는 흐르지 않았다.

 Fed가 지난달 3~17일 미국 내 64개 주요 은행의 대출담당 책임자를 대상으로 민간 분야 자금대출 조건과 현황을 조사한 결과 최근 3개월(4~6월) 연속 민간 부문 대출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블룸버그통신이 7일(한국시간)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7월 말 현재 미국 상업은행의 가계 및 기업 부문 총대출 잔액은 1조450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올 들어 1807억 달러(14.2%) 늘어난 것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이처럼 대출 잔액이 늘어난 것은 주택이나 자동차 구매 자금에 대한 대출 조건이 크게 완화된 덕분이라고 블룸버그는 분석했다. 30년 만기 모기지(주택담보대출) 금리의 경우 지난주 3.49%까지 떨어졌다. 이는 1년 전(4.39%)보다 0.9%포인트나 낮아진 것이다. 리먼브러더스 사태 직후인 2008년 모기지 금리는 6.5%였다.

 전문가들은 Fed가 경기부양을 위해 사실상 제로금리와 두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 조치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민간 부문의 신용불안 때문에 자금을 꼭 움켜쥐고 있던 은행들이 드디어 돈을 풀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들은 대기업과 중견기업 등 기업 부문에 대해서도 대출 조건을 완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여전히 돈줄을 죄고 있다고 Fed는 진단했다.

 도이치뱅크 뉴욕지점의 이코노미스트 조셉 라보냐는 “은행들이 2~3년간 대출 조건을 조금씩 완화해 왔지만 지금은 민간의 자금 수요도 늘어나고 있는 점이 고무적”이라며 “대출이 점차 더 늘어날 것 같다”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이처럼 시중은행들이 돈을 푼 덕에 높은 실업률의 충격을 흡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미국 고용시장에서 신규 취업자는 16만3000만 명이 늘어 시장의 전망치를 크게 상회했다. 다만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많아져 실업률은 8.3%로 높아졌다. 최근 미국 은행들이 돈줄을 푸는 것은 경기 전망을 낙관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풀이된다. 그동안 상당수 은행이 부실채권 처리에 힘을 쏟아온 가운데 최근 금융시장이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자 고객 확보 차원에서 대출 조건을 완화하는 측면이 있다고 Fed는 밝혔다. 특히 자동차 할부금융과 신용카드 대출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출 조건을 완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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