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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수행비서’에 웃고 우는 박근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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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수행비서, 과장, 형님. 세 가지 호칭의 공통점은 뭘까. 정답은 운전기사다. 국회의원은 자신의 차를 모는 운전기사를 수행비서라고 부른다. 과장은 로펌 변호사, 형님은 기자들 사이에 쓰이는 말이다. 무엇보다 핸들을 잡은 그들의 손에 생명과 안전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수행비서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데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에게 비밀을 빚지고 있어서다.

 며칠 전 한 재계 인사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다. 중견기업인 A씨가 자신의 승용차를 운전하는 기사에게서 엉뚱한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회장님, 5000만원만 빌려주십시오. 급하게 쓸 데가 있어서….” 명목상 빌려달라는 얘기였지만 실은 입막음해주는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 정치인들과 자주 접촉해온 A씨는 잠시 기사를 바라보다 “그렇게 하지”라고 답했다. A씨는 그에게 돈을 준 뒤 계속 차를 몰게 하고 있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될 땐 그를 먼저 귀가시킨다. 술에 취하면 혹시 자신이 기사에게 분노를 터뜨리게 될까 두려워서다.

 요즘 정치권은 ‘수행비서 주의보’로 뒤숭숭하다. 수사가 진행 중인 현영희 새누리당 의원의 돈 공천 의혹이 1차적 원인이다. 제보자는 현 의원의 운전기사 겸 수행비서다. 그는 검찰에서 “4·11 총선을 앞두고 현 의원 지시로 공천심사위원이던 현기환 전 의원 측에 3억원이 든 쇼핑백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휴대전화로 쇼핑백도 찍어뒀다고 한다. 이에 현 의원 측은 “정씨가 4급 보좌관을 시켜달라고 요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앙심을 품고 음해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한 건 이번 수사가 새누리당의 유력 경선 후보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는 점이다.

 수행비서로 불리는 직업인이 정치판, 특히 여당의 주요 변수로 떠오른 건 지난해 10월부터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중앙선관위 디도스 공격을 최구식 전 의원 수행비서와 박희태 전 국회의장 비서가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당시 한나라당을 강타했다. 결국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당 문패를 ‘새누리당’으로 바꿔 달아야 했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구속으로 이어진 파이시티 수사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운전기사였다. 최 전 위원장에게 돈을 건넨 건설업체 대표 이동율씨의 기사가 최 전 위원장에게 보낸 협박편지가 결정적 단서가 된 것이다. 기사는 이씨에게서 9000만원을 받아 신발가게를 차렸다. 따지고 보면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역시 운전기사에게 발목이 잡혔다.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기사의 제보로 중국 밀항에 실패하지만 않았다면 이 전 의원 구속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전 위원장에겐 운전기사들이 결과적으로 당권 장악을 도운 ‘백기사(白騎士)’도 되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흑기사(黑騎士)’도 된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이 ‘차떼기’로 대선자금을 전달받을 때 동원된 것은 운전기사가 아니었다. 이 후보의 측근 변호사와 대기업 상무가 직접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150억원이 든 화물트럭을 주고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돈 공천 의혹은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우쳐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운전기사에게 돈 심부름을 맡길 만큼 비리 불감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대형 로비나 국회의원 자리에 비하면 신발가게나 4급 보좌관의 꿈은 작고 소박한지도 모른다. 그 작은 욕망들이 차 뒷좌석에 기대어 앉은 자들의 큰 욕망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한 것인지 폭로하고 있다.

 SBS 드라마 ‘추적자’는 한국 정·재계를 약점으로 물고 물리는 세계로 그린 바 있다. 상대방의 약점을 쥔 자가 강자의 자리에 앉는 게임. 대선 후보의 뒷거래 장면을 담은 휴대전화가 최강의 무기로 등장한다. 현실 속 정치에선 그 약점을 운전기사 혹은 수행비서가 쥐고 있다. 보수의 정치라는 것이 대체 얼마나 날림으로 지어졌다는 얘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