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회사 다니는 우리 아빠, 왜 휴가가 없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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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사무용품 업체 P사에서 일하는 김모(52)씨는 최근 여름휴가 5일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김씨는 2007년 입사 후 한 번도 휴가를 쓴 적이 없다. 김씨가 따지자 회사 측은 ‘법정공휴일은 근무일이며 이날 쉬면 연차를 쓴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내 규정을 보여줬다. 설·추석 등 공휴일이 원래 근무일인데, 그날 쉬었기 때문에 연차를 전부 소진했다는 얘기였다. 김씨를 비롯한 직원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입사 당시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씨와 같은 처지의 생산직 직원 전원(105명)에게 여름휴가는 남의 얘기다. 김씨는 고용노동부에 호소했다. 하지만 “합의 사항을 몰랐어도 합법적인 동의 절차를 거쳤다면 문제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김씨는 “당연히 쉬는 날로 알고 있는 공휴일을 연차로 돌리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 중소기업에서 법조항을 교묘히 이용해 직원들의 휴가 사용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민원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공휴일에 쉰 것을 연차를 사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연차대체’를 통해서다. 정부 사이트 ‘국민 신문고’의 게시판에는 ‘연차대체·연차수당’ 관련 상담글이 올해만 200여 건 올라와 있다. 노사분쟁 인터넷 카페 등에도 한 달 평균 10~20건씩 관련 글이 올라온다. 직원 100명 이하 규모의 중소기업에 이런 사례가 많다.

 근로기준법 등에 따르면 유급휴일은 근로자의 날(5월 1일)과 일요일뿐이다. 설·광복절 등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은 공공기관의 의무 휴일일 뿐 사기업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은 노사 합의에 따라 무급으로 공휴일을 쉰다.

 그러나 일부 중소기업은 유급으로 공휴일에 쉬는 대신 연차를 소진시키는 이른바 ‘연차대체’ 제도를 운용한다. 법을 교묘하게 적용시켜 휴가를 제한해온 것이다. 일각에선 이를 ‘안티 홀리데이(anti-holiday)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2012년 기준으로 법정공휴일은 총 16일(일요일 제외). 이를 근로기준법상 보장 연차(15일)로 대체할 경우 휴일은 딱 하루가 남는다. 사실상 휴가가 없는 셈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연차대체를 쓰는 기업은 주로 대기업 납품업체라 생산량을 맞추려면 연차를 모두 보장해주긴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근로기준법(62조)은 사용자가 근로자 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한 경우에만 연차대체를 허용한다. 지난해 7월 대법원은 “서면 합의 없이 연차대체를 썼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근로자에게 일부 승소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중소기업은 근로자와 충분한 합의 없이 연차대체를 시행하고 있다.

 중소 규모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이모(24)씨는 최근 병원장에게서 “공휴일에 쉬었기 때문에 연차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병원장이 보여준 근로계약서에 그런 항목이 있었다. 이씨는 “해당 항목을 슬그머니 계약서에 포함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노무법인 아성의 김종찬 대표 노무사는 “100명 이하 사업장의 경우 90%가 연차대체를 실시하고 있지만 근로계약서에 몰래 관련 사항을 넣고 서명을 받는 편법을 쓸 때가 많다”고 말했다.

 단국대 하갑래(법학) 교수는 “일반적으로 공휴일은 쉬는 날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법을 잘 모르는 근로자들에게 연차대체가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진영은 인턴기자(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근로자 연차 사용 막는 일부 기업 행태

- 국경일, 추석·설 등 법정 공휴일에 근로자 쉬게 하고 연차로 처리

- 근로자 동의 없이 노조를 통해 연차휴가대체제 합의

- 사전 설명 없이 근로계약서에 몰래 연차 대체 조항 넣고 동의 받아

- 임금에 다음 달 연차휴가 보상비 미리 포함시켜 연차 사용 제한

- 연차보상비 지급 안 하기 위해 퇴사 앞둔 근로자에게 미사용 연차 쓰라고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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