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 석 달 만에 권력 정점서 ‘숙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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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61년 5·16 직후 서울 시청 앞에서 박정희 소장(오른쪽)과 나란히 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왼쪽). 쿠데타 성공 뒤 국방부 장관으로까지 추대됐지만 석 달 만에 반혁명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됐다. [연합뉴스]
장도영

1961년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장도영 12대 국방부 장관이 3일 밤(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별세했다. 89세.

 장면 내각의 제2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다 5·16에 연루된 고인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 중심에 서 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박정희 소장에 의한 쿠데타가 성공한 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으로 차례로 추대됐다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6월 해임됐다. 8월엔 중장으로 예편했고,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됐다. 62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난 뒤 그해 5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50년 동안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미국이 그의 삶터였다.

 고인은 69년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93년까지 웨스턴 미시간대에서 정치학 교수를 지냈다. 은퇴 후엔 부인과 함께 플로리다주에 거주해왔다. 십수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왔다. 5·16 당시 육군 6군단장으로 있다가 고인과 같은해 미국으로 건너간 김웅수씨는 2001년 한 인터뷰에서 “장씨의 정착지는 사실상 혁명정부가 정해준 것”이라고 밝혔었다.

 고인은 ‘5·16에 대한 계획을 미리 알고도 묵인·방조했으며, 결국 박정희와의 권력 투쟁에 밀린 것’이란 의혹을 받았지만 이를 강하게 부인해 왔다. 언론과 인터뷰를 일절 피하던 그는 5·16 발생 40년 만인 2001년 회고록 『망향』을 발간해 “쿠데타 세력의 음모를 사건 발생 하루 전에야 파악했다. 내가 쿠데타를 지원, 방조했다는 얘기는 쿠데타 세력이 날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고록 후반부에 “소위 5·16 정변 주체라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민주발전 과정에 중대한 장애가 됐고, 우리 민주정체에 암적 요소를 이식했다고 나는 본다”(272쪽)고 적었다. 그러면서 “육군을 지휘하는 참모총장으로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고, 사후에도 진압하지 않았으며, 원상으로 복귀하는 일마저 놓치는 등 연달아 세 번 실패를 범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만들었다”고 후회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평안북도 용천 출신인 고인은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마친 후 일본 동양대학 사학과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다. 이후 국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육군참모차장, 제2군 사령관 등을 거쳐 61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6·25전쟁 때 공훈으로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백형숙씨와 아들 효수(재미 사업)·경수(의사)·진수(사업)·완수(의사)씨, 딸 윤화(미 아이오와대 의대 교수)씨 등 4남 1녀가 있다. 장례식은 8일 미국 LA에서 가족장으로 열린다. 국내 연락처 02-798-3155, 011-264-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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