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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대만의 오늘, 한국의 내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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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4년 만에 방문한 대만에서는 때아닌 국기(國旗) 논쟁이 한창이었다. 올림픽에 참가한 대만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현지 교민들이 런던 거리에 내건 청천백일기가 올림픽조직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철거된 탓이었다. 1984년 올림픽에 처음 참가하면서 대만은 ‘중화민국’이라는 공식 국호 대신 ‘중국 타이베이’라는 명칭을 쓰며 국기는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을 받아들인 바 있다.

 이 때문에 이번 국기 철거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이렇듯 세세한 부분까지 압력을 가하는 중국에 대한 분노가 지배적이었다. 평소에는 청천백일기를 국기로 인정하지 않아왔던 야당 민진당조차 “국기의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됐는데도 국민당 정부가 수수방관할 수 있느냐”며 강력히 비난하고 나선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대만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한계와 내부 정체성의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번 논쟁이 남긴 상처는 간단치 않아 보였다.

 5월 20일 집권 2기를 시작한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고뇌 역시 이 문제에서 멀지 않다. 그는 취임사에서 ‘비통일·비독립·무력불사용(不統·不獨·不武)’이라는 3불 정책을 양안관계의 기본 지표로 제시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른 흡수통일도 반대하지만 대만 주권론에 기초한 독립국가 구상도 수용할 수 없으며, 현재의 양안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대만의 생존과 번영, 국제적 지위를 유지해 나가려면 현상유지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인 셈이다.

 기실 마 총통은 2008년 집권 1기부터 이러한 원칙하에 전향적인 양안관계를 모색해 왔다. 본토와의 3통(通郵·通航·通商) 정책을 통해 경제사회 분야의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는 한편 2010년 6월에는 해협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ECFA)도 체결해 경제관계를 획기적으로 전환했다. 성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2009년 -2.0%였던 대만의 경제성장률이 2010년 10.8%로 증가했고 대중(對中) 상품수출은 한 해 만에 41.8% 증가로 돌아서면서 무역수지 역시 흑자로 전환됐다. 더욱이 지난 4년 동안 대만을 방문한 중국 본토 관광객 수가 물경 466만 명, 관광수입만 66억 달러에 달한다. 통항협정 초기 주 20회에 그쳤던 양안 간 직항 항공편도 550편 이상으로 늘어났고 100만 명 가까운 대만인이 현재 중국 본토에서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고 있다.

 중국·대만보다 훨씬 일찍 교류협력을 시작한 남북한 관계가 이제 파탄에 가까워져 버렸으니 이러한 상황이 여간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분명히 마 총통의 업적이고 그의 재선 역시 상당 부분 그 덕분이었다. 그러나 비판과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이러한 진전을 기정사실화하며 정부가 서비스부문 자유화와 투자보장 등 현안 문제를 조기 타결하고 양안관계 개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주문한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ECFA의 혜택이 관광산업 같은 일부에만 치중돼 있는 데다 대중 무역의존도가 심화하면서 대만 경제가 중국에 예속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높은 성취를 이루고도 찬반 양측에 끼어 협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난제는 이것뿐이 아니다. 경제협력은 가장 초보적인 조치일 뿐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려면 대만은 정치나 군사 부문에서도 중국과 가시적인 신뢰를 구축해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양안 간 군비 경쟁 양상에서도 드러나듯 이 분야의 진전은 극히 제한적이다. 두 가지 큰 구조적인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는 까닭이다.

 첫째는 미국이다. 중국과 대만 사이의 군사적 신뢰 구축이나 정보교류에 워싱턴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을 안보의 지렛대로 삼아 생존을 담보해온 대만으로선 중국과의 군사적 신뢰 구축에 선뜻 나설 수 없는 이유다. 둘째는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다. 중국이 대만과의 즉각적인 통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에 따라 대만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를 희망해온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민진당과 다수 국민은 이러한 협정이 중국 주도의 일국양제형 통일을 여는 서막이 될 수 있다고 염려한다. 마 총통이 처한 진퇴양난의 딜레마다.

 “10년 후의 미래를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 모두 불확실성의 포로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침몰을 지켜보는 듯하다.” 저명한 정치학자인 추윤한 대만국립대 교수가 묘파한 대만의 오늘이다. 뿌리 깊은 정치사회적 균열이 미래를 여는 돌파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한국의 현실이 떠오른 것은 필자의 과민함 탓일까. 대만의 딜레마를 자꾸 곱씹게 되는 이유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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