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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파이란(2001)

중앙일보

입력

겨울 바닷가에서 편지 한 통을 부여잡고 눈물을 삼키는 그는 참 쓸쓸한 남자다. 세상은 그를 사랑할 여력이 없고 그는 세상을 사랑할 의지가 없다. 실패한 삼류 인생 이강재(최민식) 는 같은 건달들에게조차 "이 겁 많은 놈아,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라는 충고를 들어야 하는 기막힌 인생이다.

겨울 바닷가로 달려올 그에게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란 사연이 담긴 편지를 부치는 그녀도 애처롭긴 마찬가지다. 살고 싶은 의지가 있긴 해도 홀홀단신 건너온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기란…. 그래도 중국 여인 파이란(장바이츠) 은 남모르는 사랑을 품고 있었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엇갈린 시간 속에 숨겨진 남.녀의 사랑을 복원해가는 이야기인 '파이란' 은 멜로 영화지만 밑바닥 군상의 질퍽한 삶이 더 부각되는 작품이다. 그래서 한 편의 사실적인 누아르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저분한 항구, 오줌으로 얼룩진 담벼락, 에로물이 가득한 비디오가게 등 배경이 그런데다 그 속에 들어 앉은 주인공들도 여느 연인들처럼 커피 한 잔을 놓고 담소를 나눌 여유조차 없는 삭막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파이란' 은 바닥 인생을 그렸다는 영화 '친구' 보다 한층 더 깊은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자연스레 하층민들의 굴곡진 삶과 이들에게 기생하는 인간 등 사회 비판적인 요소도 적잖게 나타난다.

그러나 직접 주인공들이 표현하는 대사나 보여주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절묘하게 사랑의 고리를 연결하는 드라마 덕에 '파이란' 이 가진 멜로적 완성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인천 뒷골목의 건달 동기인 친구는 조직의 보스가 됐지만 새파란 후배들에게도 인사 한번 받지 못하는 강재는 소년들에게 포르노를 권하는 비디오가게를 맡아 일하다 그 마저 쫓겨나 오락실을 전전하는 신세다.

몇 푼이 아쉬워 불법 체류 위기에 몰린 파이란과 서류상으로 결혼한 후 살인 사건에 휘말린 그는 보스를 대신해 감옥행을 결심한다. 그런 강재에게 파이란의 사망 소식이 날아들고 법적 보호자인 그는 사망자 확인을 위해 강원도행 기차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파이란이 남긴 흔적들이 차츰 강재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한다.

'해피 엔드' (99년) 이후 오랜만에 나온 최민식은 그릇이 놓인 싱크대에 오줌을 누는 사실적인 연기에서 감춰진 파이란의 사랑을 하나씩 깨달아가는 세밀한 표정까지 걸쭉하고 섬세한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국 영화에 첫 출연한 홍콩배우 장바이츠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매력으로 눈길을 끈다. '성원' (99년) 이나 '십이야' (2000년) 에서 발랄함이 돋보였던 그녀는 '이런 배역도 어울리네' 싶을 만큼 침착하고 가냘픈 여인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강재와 파이란이 사랑하게 되는 연결 고리가 좀 더 튼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고 절정 부분의 극적 효과가 약한 것도 걸린다.

실패한 데뷔작 '카라' (99년) 로 절치부심했을 송해성 감독은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철도원' 의 아사다 지로가 쓴 '러브 레터' 가 원작이다.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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