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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바람도 실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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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안철수(이하 경칭 생략) 바람의 7할은 호남 민심이다. 나머지 3할이 수도권 20~40대다. 호남에서 그의 지지율은 65%가 넘는다. 민주통합당 측은 이런 넋두리를 한다. “아무리 정책을 내놔도 호남에선 안 먹혀요. ‘정책에 관심 없다. 박근혜 이길 인물만 데리고 와라’는 분위기예요.” 안철수 열풍을 “이미지로 존재하는 신기루”라거나 “호남에서 묻지마 식의 반사이익”이라고 헐뜯어도 소용없다. 그것 자체가 실제로는 정치적 실체다. 박근혜의 유일한 대항마로 남아 있는 한 웬만해선 호남에서 그의 바람은 잦아들 기미가 없다.

 새누리당 인사들의 안철수 흠집내기는 한심한 수준이다. 과연 다음과 같은 반론에는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① 안철수 책은 돈 주고 사보기 아깝다=훨씬 별 볼 일 없는 정치인 출판기념회에 줄 서는 풍경이 더 웃긴다. ② ‘무르팍도사’와 ‘힐링캠프’로만 거저먹으려 든다=지난 총선 때도 누가 후보인지 모르고 찍은 사람이 태반이다. ③ 검증할 시간이 없다=20년간 검증에 열을 올렸지만 존경받으며 퇴임한 대통령은 한 명도 못 봤다.

 지난해 지방선거부터 선거판은 기본적으로 야당에 유리한 구도다.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긴 게 오히려 기적이다. 지도부의 헛발질과 공천 실패에도 불구하고 야권연대는 정당 득표율에서 3%포인트 앞섰다. 지난 총선 투표율 54.3%. 하지만 연말 대선의 투표율은 10%포인트 이상 올라갈 게 분명해 보인다. 14대 이후 대선 투표율은 63~81%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투표율이 오르면 어디가 유리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안철수의 타이밍 포착은 무릎을 칠 만큼 절묘하다. 새누리당은 박근혜의 ‘복도 정치’로 사당화(私黨化) 홍역에 휩싸여 있다. 민주당은 검찰의 체포동의안에 눈이 멀어 ‘방탄국회’에 매몰돼 있다. 통합진보당은 이석기·김재연의 등장 이후 누더기가 된 지 오래다. 기존 정치권의 구태가 한꺼번에 재발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정치판이 더러운데 왜 나오냐”며 안철수를 막기는 어렵다. 잇따른 자살골로 여야가 스스로 무너지는 시점에 ‘탈(脫)정치의 정치’가 ‘시즌2’를 시작한 셈이다. 안철수가 매우 영리하거나, 기 막히게 운이 좋거나 둘 중 하나다.

 검증의 링에 오르면 잽 몇 방에 KO된다고? 글쎄다. 이미 그의 룸살롱 출입이나 BW 발행, 재벌 회장 구명운동 등은 여의도 ‘찌라시(소식지)’와 잡지에 오르내린 지 오래다. 하지만 대세는 “그 정도는 봐준다”는 쪽이다. 벤처 거품 때 룸살롱에서 흥청대다 회사 말아먹은 경우보다 훨씬 양반이라는 분위기다. 이쯤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선거를 복기(復棋)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싶다. 당시 병역 특혜를 노린 ‘양손(養孫) 입양’과 아들의 MRI 파문 등 훨씬 치명적인 네거티브 공세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박 시장은 그다지 지지율이 흔들리지 않은 채 승리했다.

 안철수 책에는 사실 새로운 내용이 없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심상치 않다. 출판업계는 “10만 권 이상 나가려면 수도권 40대와 여성 독자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독후감도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몇몇 좌파 학자들은 “CEO 출신이라 노동자 입장에는 깜깜하리라 여겼는데, 기대 이상”이라고 고백했다. 청춘콘서트에 열광한 대학생들은 “다시 한번 체계적으로 세례를 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강남 주부들조차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응이다. 서울대 의대 출신에다 기업 경영까지 한 그의 경력이 좌우 양쪽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시키는 조짐이다.

 이제 정치도 소비되는 시대다. 제품 설명서 다 읽고 물건을 사는 경우는 드물다. 디자인 마음에 들고 가격 대비 품질이 괜찮다 싶으면 누구나 지갑을 여는 세상이다. 안철수는 이런 소비자 심리를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여야가 엇비슷한 정책을 좌판에 늘어놓고 서로 ‘옳다’고 우기는 사이, 그는 ‘좋은 사람’이란 이미지로 갈아타 손님을 모으는 중이다. 대선 때마다 우리 사회에는 현격한 기압골 차이로 거센 바람이 불곤 했다. 지금 호남에서, 수도권 20~40대에서 안철수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그 정치적 의미를 함부로 깎아내릴 일이 아니다. 정치판에서 때론 바람도 실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