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기에서 5분 만에 백기로’ 사상 첫 판정번복에 운 조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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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유도 66㎏급 조준호가 29일(한국시간) 런던 엑셀 제2노스 아레나에서 열린 8강전에서 일본의 마사시 에비누마를 상대로 3-0 판정승을 거두고 환호하고 있다(왼쪽 사진). 그러나 불과 5분 만에 심판진의 갑작스러운 판정 번복으로 패배가 선언되자 망연자실하고 있다. 심판 위원장은 일본 코칭스태프의 항의를 받고 숙의한 뒤 판정을 번복했다. 조 선수는 패자부활전을 거쳐 동메달을 땄다. [런던 로이터=뉴시스]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 판정시비 악령에 시달리고 있다. 박태환(23)이 400m 예선에서 부정출발 판정을 받아 실격처리됐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제된 데 이어 유도에서도 석연찮은 판정 번복이 나왔다.

 29일(한국시간) 런던의 엑셀 노스아레나에서 열린 남자 유도 66㎏급 조준호(24·한국마사회)와 에비누마 마사시(일본)의 8강전 경기. 연장까지 치렀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해 심판들의 판정으로 승자를 결정하게 됐다. 파란 깃발 3개가 일제히 하늘로 솟았다. 3명의 심판 모두 파란 도복을 입은 조준호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장난이 시작됐다. 에비누마의 패배에 경기장을 찾은 일본 관중들이 야유를 쏟아내고 일본 코칭스태프가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비디오 화면을 살펴보던 후안 카를로스 바르코스(스페인) 심판위원장도 판정을 멈추라는 지시를 한 뒤 심판들을 불러 모았다.

 잠시 후 심판들은 제자리로 돌아와 일제히 백색 깃발을 집어 들었다. 조준호의 승리를 취소하고 에비누마의 손을 들어주면서, 불과 5분 만에 준결승전 진출자가 뒤바뀐 것이다. 바뀐 판정에 관중들도 야유를 보냈다. 조준호가 고개를 떨구며 경기장을 빠져나가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황당한 판정 번복에 현장에 있던 대한유도회 김정행 회장은 즉시 항의했고, 경기가 끝난 뒤에도 항의를 계속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대표팀 정훈 감독은 “유도에서 이런 경우는 없다. 처음 당한 일이라 너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유도회에 따르면 이날 판정 번복의 배경은 이렇다. 심판들이 판정을 내리기 전 심판위원회가 판정을 멈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륙별 심판위원장으로 구성된 심판위원회의 한 위원이 문제를 제기했고, 심판위원장이 이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심판위원장이 비디오 판독을 통해 연장전에서 기술을 건 에비누마에게 점수를 주면서 승부는 뒤바뀌었다.

 이번 판정 번복은 절차가 완전히 무시됐다는 것이 유도계의 의견이다. 어느 종목이건 심판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고유권한이다. 그 권한을 좌지우지하는 위원장이 경기를 지켜본다면 심판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 강동영 유도회 사무국장은 “심판위원회는 주심이 최종 판정을 내리기 전에 이의 신청이 들어온 만큼 판정 번복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심판 고유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도회는 추가적인 대응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강 사무국장은 “일단 회장님이 직접 구두 항의로 의견을 피력하셨다”며 “다른 공식적인 절차는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정번복에 대해 국제유도연맹(IJF)은 원론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IJF 대변인 니콜라스 메스너는 “심판진의 판결을 뒤엎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승부는 접전이었다. 우리는 이길 자격이 있는 선수가 승리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일본 교도통신조차 영화 ‘바보 삼총사’를 패러디한 것처럼 심판들이 잠깐의 회의를 가진 뒤 판정을 번복했다며 비꼬았다. 공식적인 항의 절차가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조준호는 패자부활전에 나갔다. 조준호는 패자부활전과 동메달 결정전을 잇따라 승리해 동메달을 따냈다.

 한편 북한의 여자유도 안금애(52㎏이하)는 결승전에서 야네트 베르모이를 연장전에서 유효로 꺾고 북한에 대회 첫 금메달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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