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규모보다 콘텐트 … 영국 문화의 힘 보여준 개막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27일 밤(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비틀스가 활동할 당시의 공연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다. 이날 비틀스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가 ‘헤이 주드’를 부르면서 개막식의 엔딩을 장식했다. 연출을 맡은 대니 보일 감독은 비틀스와 해리 포터, 셰익스피어 등 콘텐트를 앞세운 ‘문화 개막식’으로 올림픽의 성대한 막을 올렸다. [런던 AFP·로이터=연합뉴스]
대니 보일 개막식 연출자

27일 밤(현지시간) 열린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이른바 영국류(英國流)가 세계와 어떻게 호흡하고 있는지를 3시간의 장편영화처럼 보여줬다. 영국의 세계적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로 시작해 비틀스의 명곡 ‘헤이 주드’로 마무리 지은 대서사의 지휘자는 영국의 세계적인 영화 감독 대니 보일(55)이다. 그는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로 아카데미 8개 부문을 휩쓴 바 있다.

 올림픽 개막식은 개최국의 자랑거리를 마음껏 뽐내는 축제다. 그리스와 중국은 아테네 올림픽(2004)과 베이징 올림픽(2008)을 통해 자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과시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사상 최대 규모인 1억 달러(약 1140억원)를 투입해 ‘수퍼 파워’ 중국의 위세를 전 세계에 떨쳤다. ‘야심 찬’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장이머우(61)가 지휘했다.

007과 함께 헬기를 타고 스타디움에 도착한 엘리자베스 여왕(스턴트 대역)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런던 AFP·로이터=연합뉴스]

 ◆스토리로 차별화=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그런 위세와 규모 대신 ‘스토리’를 택했다. 대니 보일 감독에게 주어진 예산은 베이징 올림픽의 절반도 안 되는 4800만 달러였다. 물량과 규모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차별화된 콘텐트로 승부를 보자는 의도였다. 영국의 풍부한 문화 콘텐트는 스토리 있는 올림픽 개막식을 만들어내는 밑바탕이 됐다. 대니 보일 감독은 셰익스피어, 비틀스, 007, 미스터 빈, 해리 포터 등 영국에서 태어나 전 세계의 것이 된 영국 문화상품을 개막식의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이런 익숙한 소재들로 전 세계에 ‘친근하고 리버럴한 영국’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서울대 변창구(영문과) 교수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교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면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민족적 색채를 배제하고 글로벌한 이미지를 줬다”고 평가했다. 올림픽의 서막을 알린 건 셰익스피어의 희곡 ‘더 템페스트’의 대사가 적힌 대형 올림픽벨이었다. 한국 셰익스피어학회장 박정근(대진대) 교수는 “화합의 장인 올림픽에서 전 세계를 묶어줄 상징적인 인물로 셰익스피어를 활용한 것은 적절한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언 앳킨슨이 깜짝 등장해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웃음을 선사했다. [런던 AFP·로이터=연합뉴스]

 ◆과시하지 말되 유머 있게=곳곳에 유머코드를 넣은 것도 베이징 올림픽과의 차별점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007의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의 헬기 낙하 연출이나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언 앳킨슨(57)의 깜짝 등장은 허를 찌른 개막식의 백미였다. 007의 헬기 낙하 연출은 007 탄생 50주년 영화 ‘007 스카이폴’의 제목을 재치 있게 은유한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연출에는 영국인 특유의 ‘진지하지 않기’ 규칙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영국인의 특성을 관찰한 사회학자 케이트 폭스는 “진실함(sincerity)은 괜찮으나 진지함(earnestness)은 절대 안 된다. 이 미묘한 차이를 모르면 영국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대니 보일 감독은 산업혁명, 복지제도, 인권보장 등 자국의 역사를 보여주면서도 열광적이거나 장엄하게 포장하지 않았다. 이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풍자·해학으로 그려낸 셰익스피어, 인간의 내면을 냉소적으로 들여다본 오스카 와일드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막식의 대미는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70)가 장식했다. 현장의 8만 관중은 물론 전 세계가 그와 함께 ‘헤이 주드’를 불렀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영국이 자국의 팝음악을 가장 훌륭한 문화상품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 것”이라며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이 지금은 문화콘텐트의 ‘매력’으로 영향력을 과시하는 강대국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개막식에서 노동자들로 분장한 출연자들이 용광로에서 O자형 링을 만들고 있다. 용광로는 산업혁명을 상징한다. 이 링이 올라가 4개의 원과 합쳐져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 모양을 만들었다. [런던 AFP=연합뉴스]

 ◆우리는 어떤 콘텐트 내세울까=전문가들은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보듯 예산과 스케일이 아닌, 소통과 매력이 성공적인 개막식의 관건이라는 점을 인천 아시안게임(2014)과 평창 겨울올림픽(2018)을 앞둔 우리가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21세기 스포츠제전은 지난 세기 행사들과 달리 하나 된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며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비틀스 노래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발달된 정보기술(IT) 문화, K팝으로 대표되는 한류,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등 문화적 공유점을 잘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개막식에 참석한 임권택 감독(76·인천 아시안게임 개·폐막식 총감독)은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용광로 쇳물이 오륜기로 연결되는 장면이 돋보였다”며 “한국적 정서에 젊음과 첨단 IT 기술을 접목해 감동적인 개막식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