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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를 부자답게 만드는 조직… 패밀리 오피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손만대 부의 영속 아닐까. 그중에서도 재산이 1억 달러 이상, 대충 1000억원 이상의 거부(巨富)를 영어권에선 AR로 표기한다. ‘Absolutely Rich’의 약자로, 우리 말로 ‘절대 부자’쯤 된다. 이 정도면 몇 대 후손까지 ‘절대적으로’ 호강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 못하다. 부를 쌓기보다 지키는 것이 서너 배 힘들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한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 외환위기 때만 해도 그랬다. 숱한 기업이 무너지는 바람에 ‘부자 3대 가지 못한다’는 속설이 현실이 됐다.

그래서 100년 이상 부잣집을 이어가는 방편으로 탄생한 것이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라는 조직이다. 창업주의 가치관을 받들어 가계 철학을 수립하고 유산·가업의 2세 승계와 투자 등 자산관리, 사회공헌 활동 등을 자문·수행하는 사적(私的) 전문가 조직이다. 미 록펠러나 유럽 로스차일드 등 19세기 이후 구미의 부호 집안에서 비롯돼 그 수효가 증가일로다. 변호사·회계사·금융전문가 등을 고용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은행·보험·증권사를 통한 아웃소싱도 늘고 있다. 금융회사 입장에선 부자 고객 확보를 위해 ‘집사 서비스’ 등 이름을 내걸고 패밀리 오피스임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래서 금융권에선 패밀리 오피스를 ‘가문자산관리서비스’로 흔히 번역하지만 광범위한 원래 취지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길 꺼리는 패밀리 오피스의 속성상 정확한 숫자를 집계하긴 어렵다. 미국에 4000개 정도가 있다고 하고 세계적으로 1만 개에 육박한다는 추산이 있다. 2008년 이후 미국·유럽발 금융위기로 구미의 패밀리 오피스들이 싱가포르·홍콩 등 상대적으로 안전한 아시아 쪽으로 옮겨오는 추세다. 아시아에는 신흥 부호가 많아 패밀리 오피스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법규로는 부자나 기업이 별도의 패밀리 오피스를 원칙적으로 설립할 수 없다. 하지만 대기업집단의 본부 조직이나 금융회사의 VIP 서비스 등 그 기능을 일부 해주는 형태는 늘고 있다. 대기업집단의 지주회사나 비서실은 사실상의 패밀리 오피스다. 오너는 법무·재무·홍보 조직을 통해 법률·회계·금융지원이나 이미지 관리 서비스를 받는다. 그룹 비서실이나 계열사가 암묵적으로 패밀리 오피스 기능을 도와주는 것이다.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을 일으켜 재산가가 된 이들이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치 않다. 동네 은행이나 증권사 프라이빗뱅킹(PB) 점포에 찾아가 귀동냥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 패밀리 오피스 기능이 시급한 곳은 재벌보다 동네 부자다. 실제로 매출 수백억원대 정도 업체 오너를 종종 접하는데 불황기 자산관리나 2세 승계 등 문제로 끙끙 앓고 있었다. 단독으로 힘들면 중소기업주들이 모여 멀티 패밀리 오피스(Multi Family Office)라도 구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내 크고 작은 부자 조직은 1만 개 정도로 추산된다. 지역별 로터리클럽·라이온스클럽 같은 외국계 봉사단체를 비롯해 지역별 상공회의소,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 등이다. 서울 강남이나 성북동 같은 부자동네의 부녀회, 지방 유지들의 사교모임도 부자조직에 속한다. 이런 조직들도 멀티 패밀리 오피스를 지향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전문가 양성도 시급함은 물론이다.

어떤 형태든 우리나라에선 진정한 의미의 패밀리 오피스가 없다. 자산관리나 유산 상속, 가업 승계 등 돈 문제에 치중할 뿐 부자철학의 제고나 가족 간 분쟁 가능성 차단 등 고차원적인 일을 도와주지 못한다. 대기업 총수는 매스컴에서나 접할 뿐 평생 만날 일은 없다. 우리 주변에서 접하는 부자는 동네부자다. 이들 부자의 불안을 덜어주고 부를 건강하게 오래 유지하게 도와주면서 자신의 터전에서 이웃에게 좋은 일 많이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패밀리 오피스의 역할이다.

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부자학연구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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