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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기본조약 시대를 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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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명림
연세대교수·정치학

올해 12월 대선과 내년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비전과 대안들이 분출하고 있다. 남북관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특별히 내년은 한국전쟁 정전(停戰) 60주년을 맞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를 향한 일대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국가 건설·산업화·민주화에서 한국민들이 보여준 ‘세계적 성취’와 비교할 때 남북 화해·평화·통일 문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 지체’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정전 이후 지금까지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가운데 전방위적 국제협력, 비약적 국가발전, 점진적 남북관계 개선을 이룩한 성과는 결코 폄하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는 남북 적대와 북핵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선 인식의 발본적 전환이 절실하다. 최근 발표된 ‘한반도포럼 리포트’가 보여주었듯 전환의 핵심 요체는 남한과 북한이 유엔 회원국가로서 상호 국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남북관계3.0’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냉전시대와 탈냉전시대의 남북관계는 각각 ‘남북관계1.0’과 ‘남북관계2.0’에 해당된다. ‘남북관계1.0’의 시기 동안 남과 북은 상호 실체를 전면 부인한 채 적대와 반목, 증오와 비방, 군사충돌을 지속했다. ‘남북관계 2.0’ 시기에는 남북기본합의서와 6·15 공동선언에 바탕해 상호 인정과 부인, 협력과 적대, 공존과 간섭을 교차 반복했다.

 ‘남북관계1.0’의 근본틀은 한국전쟁이 낳은 ‘정전체제’이며, ‘남북관계2.0’의 기본질서는 북핵 문제가 정초한 ‘북핵체제’였다. 남북관계 60년을 관통한 ‘정전체제’와 ‘북핵체제’는 모두 북한 군사주의의 산물이었다. 이 두 체제는 남북관계의 본질이 국가의 생존·지속·소멸과 직결된 정치·군사·안보·평화의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남북관계1.0과 2.0을 안고 또 뛰어넘어야 할 ‘남북관계3.0’은 이러한 남북관계의 본질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즉 남북의 정통성·국력·체제경쟁이 종식된 상황에서 국가성·독립성·주권성에 대한 상호 인정을 통해 국가 대 국가로서의 보편적인 국제규범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에 바탕해 통일을 지향하는 국가 대 국가의 특수관계로서 ‘남북기본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남북기본조약 체결이 남북 분단과 통일과업에 근거한 대한민국 헌법정신과 헌법 현실의 이중 규범성, 즉 헌법 제3조(영토조항)와 제4조(평화통일조항)의 창조적 결합이라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남북기본조약’이 추동할 ‘남북관계3.0’ 시대에 남과 북은 내부문제는 물론 상호 간에도 민족논리를 넘어 무엇보다 국제행위가치와 규범을 확고히 준수하게 된다. 따라서 기본조약은 남과 북에 혜택(안전보장)과 부담(국제규범 준수)의 이중 의미를 갖는다. 요체는 자유·평등·화해·인권·평화의 보편가치의 증진이기 때문이다. 관할구역은 존중되며 군사위협·내정간섭·상호비방은 중단된다. 민족논리를 안고 넘기 때문에 보편가치로서의 비핵·평화·안보에 대한 상호 요구는 더욱 철저하며 확고하다.

 나아가 남북기본조약체제가 국제협력과 결합될 때 비핵·평화(국제사회 요구)와 체제안전(북한 요구)의 정면교환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 북·미 국교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의 길 역시 가능해진다.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안정화가 초래할 남북 경제협력, 남한 경제 재도약, 남남갈등 완화는 연쇄효과로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화와 경제통합화는 궁극적 통일로 연결될 것이다.

 남북 상호 인정과 기본조약체제는 남북관계의 안정화·보편화·예측 가능화, 북한 변화와 북핵 문제 해결을 넘어 남한 내부적으로도 꼭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남한 사회에서 반복되는 전임 정부 대북정책의 부정, 북한의 정책 선택에 따른 냉탕-온탕 왕복, 보수-진보의 극단적 정책 대결, 남남갈등의 심화는 이제 대북정책의 단절과 혼선을 넘어 사회통합의 파괴라는 막대한 체제비용으로 귀결되고 있다.

 따라서 대북정책의 일관성과 남북관계의 안정성, 궁극적 통일 목표의 추구, 그리고 남한 사회의 국민통합을 위해 이제 진보-보수, 남과 북이 동의할 수 있는 남북관계의 보편화와 제도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국민대표인 국회의 비준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남북기본 ‘조약’ 체제는 준비과정, 남북 합의, 국회 논의, 정책 집행의 모든 단계마다 국민 동의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남남갈등 대신 높은 여-야 및 진보-보수 합의, 그리고 법적·정치적·국민적 안정성·지속성·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장구한 단일민족 역사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단 한 번도 단일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한 적이 없었던 남한과 북한 국민들이 ‘남북관계3.0’과 ‘남북기본조약 시대’ 진입을 통해 영구평화와 남북 통일의 가슴 벅찬 첫 문을 활짝 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박명림 연세대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