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동방정책 거점, 100년의 잠에서 깨어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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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동토 아래서 100년 넘게 동면하던 블라디보스토크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집권 3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아시아 중시전략에 따라 거점 도시로 집중 개발되기 때문이다. 투자규모가 20조원이 넘는다.

러시아 극동개발의 상징으로 등장한 루스키섬 연륙대교. 길이 3100m인 4차로 다리다. 교각 간 거리가 1104m로 세계 최장이며 높이도 324m로 세계 최고다. [연합뉴스]<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상징은 ‘모스트 나 오스트로브 루스키 (루스키섬 연륙대교)’와 ‘잘라토이 로그(금강만)’ 대교다. 연륙대교는 시와 루스키 섬을 연결하는 길이 3100m, 4차로 다리. 교각 간 거리가 1104m로 세계 최장이며 높이도 324m로 세계 최고다. 덴마크·프랑스 회사가 각각 입지연구와 강관 제작에 참여했고 러시아 회사가 건설했다. 20세기 전반부터 거론돼 39년과 60년 실현될 듯하다 무산된 뒤 다시 50여 년이 지나 결실을 보는 숙원의 다리다. 추르킨 지역을 끼고 이와 연결된 금강만 대교(2.1㎞)도 19세기 말 구상됐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공산혁명, 제2차 세계대전 등 역사의 곡절 속에서 무산됐던 한 맺힌 다리다.

 각각 332억 루블(약 1조3000억원), 198억 루블(약 7900억원)이 투입된 두 다리의 의미는 돈이 아니라 ‘통합과 미래’에 있다. 지금껏 블라디보스토크는 ‘금강만’과 ‘동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세 토막 나 체계적 개발이 힘들었고 항구 기능도 금강만으로 몰렸다. 경제가 어려워 인구는 줄기만 했다. 건너편에 가려면 차로 한 시간씩 걸리던 거리가 이제 5분 내외로 연결되면서 급속한 경제 통합이 예상된다. 특히 연륙대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창구로 ‘태평양 시대’라는 미래로 다리를 뻗을 수 있게 했다.

 지난 18~20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북쪽 국제공항에서 남쪽 끝 연륙대교까지 돌아봤다. 빗속에서도 건설 열기가 식지 않았다. 9월 6~7일 열릴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회의 준비 때문이다. 1880년 시로 승격한 이후 첫 대규모 국제행사여서 현지인들은 이를 ‘블라디보스토크의 88올림픽’이라고 말한다. 회담장인 루스키섬엔 하얏트 호텔, 컨벤션센터 등 새 건물이 줄줄이 들어섰다. 섬 인근엔 시원하게 뻗은 해안 도로와 해안 별장 등이 건설됐다. 이른바 ‘뉴 블라디보스토크’다.

 구 도시도 개발되고 있다. 낡고 좁은 국제공항을 대신할 크네비치의 ‘터미널 A’가 완공을 앞뒀다. 새 공항철도도 연결된다. 교통난에 시달리던 구공항 도로도 확·포장됐고 해안~신공항 44㎞ 신도로도 만들었다. 택시기사 게나디(52)는 “구멍투성이 도로가 거의 정비됐다”고 했다. 200억~230억 달러(약 23조~26조원)에 달하는 집중 투자 덕에 살기가 좋아졌고 그래서 인구도 지난해 6000명쯤 늘었다. 젊은 엄마 갈랴는 “유치원이 모자랄 지경”이라고 말했다. 시의 각종 경제지표도 모두 플러스다. 진행 중인 60여 개의 각종 프로젝트엔 가스관 건설, 전기선의 신설과 교체, 발전소 정비, 도로 건설, 주택 건설 같은 것이 들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이양구 총영사는 “APEC만이 아니고 이를 넘어 태평양 시대를 겨냥한 포석”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유례없는 극동 투자 뒤엔 푸틴이 있다. 집권 3기를 맞아 그의 ‘동방 관심’은 부쩍 커졌다. 지난해 11월엔 3기를 의식해 측근 알렉세이 쇼이구 당시 비상계획부 장관에게 ‘시베리아·극동 개발’ 계획수립을 지시했고 현지도 자주 찾았다.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의 노다리 시모니아 교수는 “대통령은 시베리아·극동 개발과 떠오르는 아시아를 연계시키려는 것”이라고 자신의 최근 글(글로벌 아시아 2012년 여름호)에서 썼다. 극동대 타기르 부 부총장도 “침몰하는 유럽보다 떠오르는 아시아와의 통합을 가속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맞서는 전략으로도 해석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연해주는 ‘푸틴의 플랜’으로도 부르는 이 구상의 세부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5개년 계획을 마련 중”이라는 게 이 총영사의 전언이다. 블라디미르 밀루셉스키 연해주 주지사는 지난 4월 시를 방문한 푸틴 대통령에게 ‘과거에 얽매이지 않은 신경제’를 보고했다. 이는 ‘볼쇼이(大) 블라디보스토크 구상’으로도 불린다. 현지 언론들을 종합하면 그 구상엔 ▶2020년까지 2조 루블(약 80조원)을 투입해 ▶루스키섬을 미국의 매사추세스주처럼 첨단 기지로 만들고 경제특구 기능도 추가하며 ▶블라디보스토크는 신경제도시로 만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물론 전·현직 재무장관 등의 내부 반대, 보리스 넴초프 같은 야당 세력들의 과잉투자 비판, 석유·가스 가격이 떨어지면 투자 재원이 없어질 것이란 우려 등이 있다.

 그럼에도 흐루쇼프 옛 서기장이 59년 이 도시를 샌프란시스코보다 멋지게 만들겠다고 선언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 ‘유럽의 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버금가는 ‘아시아의 문’으로 성장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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