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공부·일·사랑 이룬 터키청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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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외할아버지 이르판 규엘(83)은 1952년 자신이 싸우러 갔던 동양의 불쌍한 나라 얘기를 자주했다. “거긴 집도, 먹을 것도 없었다. 온통 헐벗은 사람 뿐이었다”고. 2002년 월드컵 때 다시 그 나라에 다녀온 외할아버지는 다른 얘기를 했다. “폐허뿐이던 곳에 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섰더라. 잠깐 사이에 어쩌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지. 대단한 나라다.” 그때부터 손자의 가슴에는 그 나라, 한국에 대한 꿈이 자랐다. 터키인 유학생 투르굿 알프 외젤(22·사진)은 22일 기자와 만나 “그 꿈을 좇아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외젤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12세 때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터키 국가대표가 된 그는 2009년 세계태권도 문화엑스포 출전차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품세 종목에서 금메달, 겨루기에서 동메달을 땄다. 터키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한국에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결심했다.

이듬해인 2010년 외젤은 앞서 5년간 태권도 강사를 하며 모아둔 돈을 털어 한국에 유학을 왔다. 터키어 과외강사로 돈을 벌며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어로 읽고 말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질 무렵, 생각도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한국전쟁기념재단(이사장 백선엽)의 해외 참전용사 후손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다.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게 된 외젤은 올 봄 한국외대 국제스포츠레저학과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가을부터는 한양대 체육학과로 옮겨 공부를 계속한다. 기회가 되면 경영학도 복수전공할 계획이다.

 ‘행운’은 계속됐다. 한국전쟁기념재단과 후원 협정을 맺은 세계적 컨설팅회사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에서 여름방학 한 달 간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터키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위해 현지 자료를 조사하는 일이다. 외젤은 “삼성·LG·현대 등은 터키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세계적 대기업”이라며 “공부를 마치고 터키로 돌아가면 일해보고 싶은 회사들인데, 그런 곳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외젤이 한국에서 얻은 게 또 있다. 터키어 과외를 하며 사제지간으로 만난 7세 연상 한국인 여자친구와 열애 중이다. “2, 3년 뒤 생활이 안정되면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지난 겨울 함께 터키에도 다녀왔다. 여자친구는 식구들을 처음 만나 ‘메르하바(merhaba)’라고 인사를 했다. 터키어로 ‘안녕하세요’다. 외젤은 “터키에선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며 “내겐 훨씬 더 가까운 제2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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