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 10억인데 급매물 5억이라니"…시세 없고 매물만 있는 부동산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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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한기자]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동부센트레빌 134.83㎡형(이하 전용면적)에 사는 허모(69)씨에겐 아파트가 평생 모은 유일한 재산입니다.

허씨는 이를 팔아 수도권 외곽의 작은 곳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작은 곳으로 옮겨 생기는 여윳돈으로 오피스텔 같은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해 매월 일정한 임대수익을 올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지난해 2월 KB국민은행 시세(KB시세)의 일반 평균가 기준인 7억8000만원에 매물로 내놨습니다.

하지만 집을 보러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허씨는 올 초부터 호가를 계속 조정해 7억1000만원까지 내렸지만 여전히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허씨는 “국민은행 시세 기준의 최저가(7억1750만원)보다 낮게 내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도대체 얼마나 더 낮춰야 팔리는 건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습니다.

요즘 허씨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집값을 낮춰 내놔도 도무지 살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집을 팔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고하는 건 지역 중개업자가 설명하는 매물동향이나 KB시세 , 실거래가 등입니다.

실거래가를 가장 먼저 참고하려 하지만 최근 거래량이 줄면서 1년 이상 기록이 없는 경우도 흔해 참고하기 쉽지 않습니다.

부동산중개업자의 설명은 아무래도 좀 미덥지 않습니다. 거래를 성사시켜야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입장이니 가격을 자꾸 조정하려 들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대출 기준이 되는 정부 공인 시세인 KB시세를 참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세를 제공하는 다른 업체 자료도 참고합니다.

이들이 제공하는 시세는 회원 중개업소의 중개업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입니다. 집주인의 부르는 호가가 주로 반영되며 일반 시세와 비교해 지나치게 낮거나 혹은 높은 매물은 매물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시세에 바로 반영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가 현실과 괴리가 크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남양주 덕소 경남아너스빌 84㎡형에 사는 김모씨는 자신의 아파트의 KB시세가 2011년 1월부터 현재까지 3억250만~3억3250만원으로 거의 변화가 없는 게 이상합니다.

인근 중개업소엔 이미 3억원에도 매물이 나와 있는데 말입니다. 김씨는 “중개업자에 물어보니 2억원대로 내놔야 수요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 같다고 했다”며 “현실과 시세 기준과 격차가 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거래량 적은 곳일수록 시세와 급매물 차이 커

거래량이 없는 곳의 중대형일수록 이런 현상은 흔합니다. KB시세에 따르면 강남구 삼성동 아이파크 195.04㎡형의 시세는 지난 2008년 9월 이후 지난달까지 3년 10개월 동안 똑같은 43억~55억원입니다. 이달 들어 38억~51억원으로 시세를 4억~5억원정도 낮췄지만 여전히 현실과 격차는 큽니다.

이 아파트 단지에서 9층 같은 주택형은 작년 11월 30억원에 실거래됐습니다. 현재도 인근 중개업소엔 30억원 초반대의 급매물이 쉽게 발견됩니다.

성남 아이파크 분당 153.39㎡형의 KB시세는 10억5500만~12억2000만원입니다. 다른 부동산 정보업체들의 시세도 9억~12억원 정도로 비슷합니다.

그런데 해당지역 중개업소에 물어보면 실제론 8억원대 매물은 흔하고 최근 5억3000만원짜리 급매물도 나와 있습니다. 층과 향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중에는 로얄층도 꽤 있습니다. 인근 J공인 관계자는 “가격 조정이 가능하니 일단 방문하라. 일단 원하는 가격을 말하면 맞춰줄 수도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매매시장에서 거래가 많지 않다 보니 경매시장의 움직임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현재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84.43㎡형의 KB시세는 9억~9억5000만원입니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지난 19일 경매시장에서 7억9151만원에 주인을 찾았죠. 경매시장에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낙찰되면 매매시장도 영향을 받아 급매물이 늘어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은마아파트에 8억원대 급매물이 늘어나는 게 대표적인 사례죠.

대치동 한 중개업자는 “지금 매매시장에서 거래가 가능하려면 KB시세 등 부동산정보업체들이 제시한 것보다 20~30%는 싸게 내놔야 할 것”이라며 “집값 하락폭은 실제 통계치에서 드러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장 상황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악화돼 있다는 겁니다. 대우증권 김재언 부동산팀장은 “2008년 이후 주택시장 침체가 이어졌지만 집주인이 호가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동안 KB시세 등 부동산정보업체 시세에 별로 반영이 안됐다”고 했습니다. 그는 “최근 버티지 못한 집주인이 하나둘 급매물을 내놓고 있어 이런 분위기가 시세에 반영되면 낙폭이 갑자기 더 커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EH경매연구소 강은현 소장은 이런 조언을 해줬습니다. “요즘처럼 거래량이 없고 급매물이 늘어나면 적정 시세를 파악하기 더 어렵다. 중개업소의 이야기에만 의존하지 말라. KB시세뿐 아니라 다른 부동산정보업체 시세 정보를 중복 확인하고 현장 답사는 기본이다. 거래동향, 매물수 등을 조사해 시세보다 낮은 급매물이 증가하는 게 일시적 현상인지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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