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빨간불 세계경제] 불황의 역사 교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세계경제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세계경제의 견인차인 미국의 경기가 하락세로 돌아선 가운데 일본은 10년의 장기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미와 아시아 금융시장은 언제 다시 위기에 빠질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양상이다.

세계경제가 갑작스럽게 침체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1825년 영국에서 발생된 경기침체를 시작으로 지난 1백80년 동안 세계경제는 10여 차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등장했던 특성들을 뽑아보고 다시 맞은 경기침체의 전망과 해법을 분석해본다.

▶무역 (자국 시장보호 최우선)

1989년 침체기 때 미국이 보여줬던 대일(對日) 무역정책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정거래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일본의 문화와 제도 2백여가지를 바꾸라고 요구했는가 하면 '최하 20%' 식으로 아예 특정 외국 상품의 판매 목표 비율을 정해줬다. 89년 미.일 구조협약과 91년 개정된 미.일 반도체협정의 내용이 그것이다. 분개한 일본 우익 인사들이 "아직 미 군정기라고 생각하는 모양" 이라며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을 소리높여 외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런 분쟁은 과거 세계경제가 불황에 빠져들었을 때도 여러차례 발생했다.

29년 대공황이 터지자 각 국은 즉각 예외 없이 '자국 이기주의' 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의 주요 무역정책은 환율. 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까지 파운드의 평가절하를 단행한데 이어 미국(34년)과 프랑스(36년) 역시 자국 화폐의 대규모 평가절하를 단행해 금본위제는 붕괴 위기에 처했다.

미국의 '301조' 는 강대국 미국이 불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차 오일쇼크로 경기가 어려워지자 74년 통상법 301조에서 무역상대국의 불공정 관행에 대한 제재조치를 규정한 후 80년대 후반 대일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쌓이자 88년 다시 이 통상법을 강화해 '슈퍼301조' 를 내놓았다. 89년 5월 미국은 일본의 3개 제품을 우선협상분야에 올려 놓겠다며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 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 ( '강력한 정부' 전면에)

'경제는 시장에 맡기자' 는 것이 요즘 분위기다. 하지만 경기가 침체돼도 이 분위기가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어려울 때는 많은 것을 정부가 떠맡게 된다.

대공황기 미국 루스벨트 정부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루스벨트는 취임 이틀 후 모든 미국 은행을 4일 동안 휴업시키고 은행에 대한 재무부 감사권을 인정하는 '긴급은행법' 을 통과시켰다. 다음날에는 공무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한다는 '경제법' 을 의회에 제출했다.

'정부 개입 최소화' 를 주창했던 80년대 이후에도 87년 10월 미국 증시가 폭락하자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 정부 관료의 말을 인용해 "불황의 위협이 다가올 때는 하늘에서 지폐를 떨어뜨릴 헬리콥터가 필요하다" 고 썼다.

미국은 90년 저축대부기관들의 4분의 1 이상이 도산 위기에 처하자 다시 직접 개입에 나섰다. 부실화된 금융기관들의 자산을 직접 인수한 정부는 졸지에 골프장.쇼핑센터.호텔 등의 소유자가 됐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때 투입된 나라 돈이 거의 5천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시장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 는 미국 입장에 반론을 제기할 때 곧잘 쓰여지는 사례다.

▶국제패권 (불황 탈출따라 우열 재편)

20세기 초만 해도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던 영국은 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며 급속히 쇠퇴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패권을 미국에 완전히 넘겨주고 만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11억파운드의 해외 자산을 잃었고 대신 33억파운드의 부채를 떠안았다. 이 중 대부분은 미국에 진 빚이었다.

74~75년 불황 탈출 과정에서는 일본이 일어섰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이 마이너스(미국 -0.1%) 혹은 제로 성장(유럽 0.9%)에 그쳤던 79~82년 침체기에도 3.7%라는 높은 경제성장률(GDP, 국내총생산 기준)을 보여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90~93년 불황 때는 양상이 다시 달라졌다. 90년대 초 불황기에 미국은 구조조정과 정보기술(IT)산업 육성을 통해 급격히 불황에서 탈출하며 10년 장기 호황을 누렸던 반면 일본은 89년 주가 폭락 이후 버블 경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패권을 건네받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노동 (勢결집력 점점 약해져)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불황이 찾아오면 노동자들은 더욱 힘을 얻었다.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급속하게 수가 늘어난 노동자들은 경기침체기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굳게 뭉쳤고 새로운 투쟁기법을 개발해냈다.

하지만 70년대 초 전후(戰後) 첫 위기가 닥쳤을 때 상황은 이미 변해 있었다. 50, 60년대 황금기를 구가하며 중산층이 된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에 취약했다. 노동운동에 강력하게 대처했던 정부도 한 몫을 했다. 74년 위기 때 GM이 디트로이트 본사의 직원 3만8천명을 한꺼번에 해고한 것은 이후 노동운동에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80년 미국 크라이슬러 노조는 회사를 폐쇄하겠다는 말에 임금과 의료혜택 삭감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미국 노조 사이에서 '양보' 는 단체 협약의 전형이 됐다.

80년대 대처 총리 시절의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84년 최강이었던 전국광원노조의 패배는 노동계에 큰 충격을 줬다. 74년 정권을 몰락시켰을 만큼 힘을 발휘했던 광원노조였지만 정부가 수천명의 노조원을 체포하며 강력하게 대처하자 1년 동안의 투쟁을 중단하고 백기를 들고 말았다.

▶전망

최근의 경기침체가 과거 역사의 패턴을 되풀이하게 될까. 우선 무역분쟁은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로버트 졸릭 미 무역대표부(USTR)대표의 강경 발언이나 미국 의회에서 '슈퍼301조 동원' 주장이 크게 잦아졌다는 점에서 조짐이 엿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 패권을 대체할 나라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근의 경기침체는 세계경제의 양대축인 미국.일본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변수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 및 중국.러시아 등 잠재력이 있는 대국들 가운데 누가 먼저 침체에서 벗어나느냐가 향후 패권 지위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불황이 장기화된다면 그 이후의 상황은 예측하기 힘들다. 참고로 선진국 모두가 장기 불황에 시달린 예는 30년대 대공황이 유일하다.

이재광 기자 im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