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이 먼저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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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신임 원장인 오길록씨(56)를 만나던 3월 어느 날. 코끝이 찡할 정도로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추위 탓일까. 그는 말을 아꼈다. 표정도 그리 밝지 않았다. 얼마 전 ETRI에 사표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23년 동안 근무한 직장. 머리 속이 많이 복잡하다고 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입장을 ‘정처 없다’고 표현했다.

2천여명의 고급 두뇌들을 거느리게 될 위치에 오른 것에 비해 그의 첫 대답은 너무 어두웠다. 그만큼 그는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ETRI 원장 선출을 전후해 오고 갔던 수많은 말들. 그것을 풀어서 듣고 싶었다.

우선 ETRI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이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과거의 문제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前원장과의 일은 모두 과거지사

오길록 원장 약력
·1945년 6월 18일 전남 해남生 ·1963년 광주제일고 졸업
·1968년 서울대 천문기상학(학사) ·1975년 한국과학원 산업공학(석사)
·1982년 프랑스 응용과학원 전산학(박사) ·1969~1978년 한국과학기술소(KIST) 시스템공학연구소 선임연구원
· 1978~1985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주전산기개발본부 본부장 ·1998~2000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컴퓨터소프트웨어기술연구소 소장
·1999넌~현재 한국소프트웨어컴포넌트컨소시엄 회장
·2000~2001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원장

그의 대답. ETRI는 2천여명의 직원 중 6백∼7백명이 박사학위 소지자인 최고의 두뇌집단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3년 동안 1천2백여명이 그만뒀다고 했다. 그것도 모두 경력 있는 연구원이. 그는 20년 이상 산 나무들이 잘려나갔다는 말을 썼다. 그 자리에 1년도 안된 어린 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고 말할 때의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현재 ETRI는 이들의 대거 이탈로 연구환경이 상당히 불안한 상태라고 그는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직원들이 떠나지 않도록 연구환경을 편안히 만드는 게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내 직장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前 원장과의 관계를 넌지시 물어 보았다. 좋지 않았다는 얘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흘러 나왔었다. ‘정원장이 그를 내쳤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또 IMF 때 정리해고를 한다는 이유로 많은 연구원들을 해고하면서 자신의 사람만 남겨 놓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때문에 오길록씨가 신임 원장으로 확정된 후 ETRI 내부에서는 많은 말들이 오갔다. 자의건 타의건 前 원장의 사람이라 인식됐던 사람들은 신임 원장에 의해 인사 보복을 당할 것이란 얘기가 확실한 소문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과거지사’란 것이다. 또 前 원장과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고도 말했다. 사람이 없어 연구도 못할 판에 보복이 어디 있겠느냐며 그는 화합을 강조했다. 인화 그리고 포용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지금껏 남이 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할 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오원장은 광주일고 출신이다. 최근 들어 광주일고가 신흥 명문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말을 지나가듯 흘렸다. 정부 주요 부처에 광주일고 출신들이 속속 전진 배치되고 있는 추세가 원장으로 선임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느냐는 뜻을 담았다.

‘하마터면 짤릴 뻔 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제일 악재(惡材)였다고 말했다. 前 원장도 광주일고 출신. 광주일고 출신이 원장직을 다시 승계할 수 없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다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이에 대해 공격도 많이 하고 염려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기관도 아니고 연구기관인데 무슨 지역 안배냐며 그는 세간에서 보내는 의혹의 눈길을 일축했다.

오원장은 컴퓨터와 관련된 연구분야에서만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그러나 ETRI는 전전자교환기(TDX) 개발, 코드분할 다중접속(CDMA)방식 세계 최초 상용화 등 통신 관련 기술개발의 메카다. 이런 상충되는 점이 ETRI를 이끌고 나가는 데 걸림돌이 될 듯도 싶었다.

그는 솔직했다. 통신 부분을 잘 모른다고 시인했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메꿔 나갈 대안을 설명해 나갔다. 대규모 연구기관이기 때문에 특정 분야에 정통한 사람보다는 관리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현재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부각되고 있는 추세인 만큼 소프트웨어 분야에 감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하드웨어 개발은 기업체에게 맡기고 ETRI는 생산성 높은 소프트웨어 개발에 치중할 것이라는 계획도 밝혔다.

훈·포장 세 번 수상

최근 들어 소위 ‘대박’을 터뜨릴 만한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을 했다.

오원장은 수긍했다. 현재는 너무 작은 연구과제에 집중해 있다고 말했다. 장기화할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발굴해 내겠다고 했다. 그래야만 우수한 인력도 기를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이제 대박거리를 찾아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대덕은 기술 벤처밸리로 각광받고 있는 곳. ETRI는 특히 기술과 인력 면에서 대덕밸리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오원장은 대덕밸리 활성화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도 ‘잘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므로 연구에 시시콜콜 간섭할 수가 없다는 것. 연구원 내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으므로 대덕밸리 활성화에 힘을 쏟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그의 견해였다.

오원장은 원구원 생활을 하는 동안 훈·포장을 세 번이나 탔다. 그는 82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PC)를 개발했다. 8비트짜리였다. 1년 6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개발한 것이다. 5천 대를 생산, 전국 실업고등학교에 제공해 컴퓨터 교육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컴퓨터가 ‘한 동안 날렸다’고 말하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 공로로 오원장은 84년 국민포장을 수여 받았다.

91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행정전산망 주 전산기를 개발한 공로였다. 주민등록 및 자동차 관리, 통관업무, 토지관리 등 전산망으로 처리되는 이 같은 업무는 모두 오원장이 개발한 행정전산망 주 전산기 덕분이다. 지난 해에는 초고속 정보화 서비스 프로그램으로 동탑 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서울대 천문기상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3학년 때 처음 접한 컴퓨터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미국서 공부하고 돌아온 서울대 물리학과 권수길 교수가 그를 친히 불러 컴퓨터를 가르쳤다고 한다. 졸업 후 KIST 전산실로 들어간 그는 그 후 지금까지 연구원 생활을 계속했다.

연구원으로서 복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오원장. 군인은 전쟁이 나야 이름이 나고 연구원은 목숨을 걸고 할 만한 연구사업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는 이 같은 연구사업을 만나왔다고 한다. 어느 연구원에게나 다 있는 흔한 일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살이 쭉쭉 빠질 정도로 괴로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좋다며 웃는다. 따라서 그는 후배들에게 어떤 연구 프로젝트가 오더라도 절대 거절하지 말고 반갑게 임하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오원장은 부인과 함께 산을 찾는다. 당일 코스로는 계룡산을 좋아하고 조금 더 여유가 있으면 지리산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는 가득 찼던 머리를 비우고 또 삶도 조금씩 비워내고 있다.

이경수 기자(korstan@joongang.co.kr)
자료제공 : i-Weekly(http://www.i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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