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성발사 실패' 시인한 이유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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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북한은 최고지도자 교체가 완성된 것이지, 최고 지도부 교체가 완성된 건 아니다.”
북한군 최고 실세로 통하던 이영호 전 총참모장의 갑작스러운 낙마를 설명하며 양시위(楊希雨·58·사진) 중국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이 한 말이다. 그는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을 기초한 장본인이다. 당시 6자회담의 중국 측 부대표로 활약했다. 외교부 조선반도사무판공실 주임을 역임하는 등 한반도 전문가로 꼽힌다. 그는 지난 18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GK전략연구원(이사장 배정호)이 주최한 ‘한·중 수교 20년과 한·중 협력’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이날 오후 중앙일보 7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영호 전 총참모장의 전격적인 실각이 화제다. 권력투쟁으로 봐야 하나.
“이영호가 모든 직무에서 해임된 건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다. 북한군 고위인사는 병이 있다고 해서 파면되지 않는다. 보통 죽을 때까지 직책을 유지한다. 2010년 사망한 조명록 총정치국장도 그렇지 않았나. 그래서 이영호 실각과 관련해 권력투쟁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북한은 현재 군부의 힘을 줄이고 대신 내각의 권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교체는 김정일 사망 뒤 김정은 승계로 완성됐다. 그러나 북한의 최고 지도부 교체는 이영호 해임에서 보듯 아직 끝난 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김정은 체제는 불안정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김정은 체제는 안정적이다. 두 가지 점을 볼 때 그렇다. 첫째, 지난해 연말 김정일이 갑작스레 사망했을 당시 북한이 보여준 모습이다. 당시 북한 내부의 모든 활동과 업무가 지극히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이는 북한 지도체제가 상당히 안정돼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둘째, 지난 4월 북한이 말하는 ‘위성 발사 실험’이 실패했을 때 북한 정부가 보여준 모습이다. 발사 실패 후 곧바로 실패 사실을 인정했다. 북한 주민에 대한 자신, 내부 안정에 대한 자신이 없으면 쉽지 않은 모습이다.”

-김정은이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은 뭔가.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선군(先軍)정치’ 사상이다. 둘째, ‘핵 문턱’을 넘어섰다. 잇따른 핵실험으로 동북아 정치에서 차지하는 북한의 전략적 위상을 높였다. 셋째, 2002년부터 실시한 7·1 경제개선 조치다. 곡절이 많았지만 시장경제 요소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넷째, 한국은 물론 미국·일본과도 거래한다는 전방위 외교의 기본전략을 수립한 점이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지 반년이 넘었다. 김정일 체제와 비교할 때 달라진 점은.
“먼저 지난 4월 김일성 탄생 100주년 행사 당시 김정은이 공개 연설에서 인민 생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점이다. 그는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북한 역사상 지도자가 이처럼 명확하게 인민의 생활고에 대해 언급한 건 처음이다. 둘째, 위성 발사 실패 이후 북한이 보여준 변화된 태도다. 2009년엔 북한의 미사일 실험을 유엔 안보리가 비난하자 북한은 곧바로 핵실험을 하는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이번에도 유엔 안보리의 비난 뒤 3차 핵실험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북한은 후속 도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올해는 핵실험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셋째, 최근 북한 정부 관리들이 외자유치 활동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는 점이다. 이를 종합했을 때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선군정치’에서 경제를 우선하는 ‘선경(先經)정치’로 전략의 중점을 이동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3차 핵실험으로 맞서지 않고, 올해 핵실험 유보를 발표한 저의가 뭔가.
“우선 미국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2월 29일 북·미가 합의한 2·29 합의가 깨진 게 아니란 것이다(※2·29 합의에서 북한은 미국의 식량지원을 받는 대신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또 미국과 한국의 대선 결과를 지켜보고 움직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한·미는 북한이 6자회담 복귀 전에 미사일 실험 발사 중단, 추가 핵실험 중단,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외에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 복귀 허용’ 등과 같은 ‘3+1’의 선행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은 이번에 미사일이 아닌 위성 발사 실험을 했고, 핵실험을 유보한다는 계획을 밝힘으로써 ‘3+1’에서 0.5만을 깼다는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2.5+1’을 놓고 협상 여지가 있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가 북한에 개혁·개방을 권유해왔다. 북한은 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 그렇게 권유하고 있고, 조금씩 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정일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시(市)정부 측에선 그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저녁 일정을 공연 관람으로 잡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낮에 이어 밤에도 기업 탐방을 요구했다. 중국 예술가는 평양으로 초청할 수 있지만 중국 기업의 경험은 현장에서 봐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북한은 한때 중국의 개혁·개방을 수정주의라 비난했다. 그 다음엔 중국의 경험을 존중한다고 하다가 이제는 찬양한다고 말한다.”

-김정은이 관람한 공연에 짧은 옷차림의 북한 여성이 대거 등장해 관심을 끌었다. 김정은 체제가 개방 노선을 택할 것이라 보는가.
“그렇다. 이미 김정일 시대에 북한은 김일성 시대에 생각할 수 없는 시장경제 요소를 채택했다. 평양 시내 곳곳에 개인 운영 상점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이를 북한의 경제개혁이라 부른다. 김정은 시대엔 더 개방적으로 변할 것으로 본다. 4·15 연설에서 조선노동당의 총목표로 강성국가 건설과 함께 인민이 잘 살 수 있게 만들겠다고 언급한 것은 큰 변화다.”

-김정은 체제가 시작된 이후 북·중 고위급 교류가 거의 없다. 양국 관계가 나빠졌나.
“그건 아니다.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내부 문제에 총력을 쏟고 있어 외부 활동을 별로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 교체에 이은 지도부 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세대교체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은 6자회담 관련 문제에 대해 일치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양국 간의 일상 업무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김정은이 연내에 중국을 방문할 것으로 보나.
“예측하기 어렵다. 중·북 간 최고지도자 교류는 당 대 당 차원에서 이뤄져 절차가 간단하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실현될 것이다.”

-올가을 중국에선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린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덩샤오핑(鄧小平) 이래 중국은 한반도에 대해 양대 전략 목표를 갖고 있다. 첫째는 한반도 비핵화, 둘째는 한반도의 평화·안정이다. 현재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공포의 평화’다. 시진핑 시대에도 이런 전략 목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에선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에만 관심을 가질 뿐 비핵화 실현엔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한다. 그렇지 않다. 안정과 비핵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반도에 핵이 있는 한, 남북은 결코 안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내엔 ‘중·북 관계가 나빠지더라도 비핵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파’와 ‘중·북 관계 유지를 위해 북핵을 용인해야 한다’는 ‘전통파’ 간의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안다.
“북한 문제를 보는 중국인의 시각은 다양하다. 인터넷을 보면 일각에선 ‘김정일 만세’를 외치고, 다른 쪽에선 ‘김정일을 때려잡자’고 말한다. 민간에 전략파와 전통파 구별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이 중국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중국이 북한에 할 말이 있을 때는 문을 닫고 말한다. 그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후에서 북한에 하는 발언 수위는 한국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양시위 1954년 출생. 중국 농민들의 바람인 ‘비가 내리기를 희망한다(希望下雨)’는 뜻에서 ‘시위(希雨)’란 이름을 얻었다. 문화혁명 직후 치러져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는 1977년 대입 시험을 뚫고 랴오닝(遼寧)대 사범대학 영어과를 나왔다. 그가 현재 몸담은 중국국제문제연구소는 외교부 산하 기구로 중·장기 전략 문제를 주로 연구한다. 2005~2007년엔 미국 스탠퍼드대 방문학자로서 아태 안보문제를 연구했다.

“북한은 최고지도자 교체가 완성된 것이지, 최고 지도부 교체가 완성된 건 아니다.”
북한군 최고 실세로 통하던 이영호 전 총참모장의 갑작스러운 낙마를 설명하며 양시위(楊希雨·58·사진) 중국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이 한 말이다. 그는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을 기초한 장본인이다. 당시 6자회담의 중국 측 부대표로 활약했다. 외교부 조선반도사무판공실 주임을 역임하는 등 한반도 전문가로 꼽힌다. 그는 지난 18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GK전략연구원(이사장 배정호)이 주최한 ‘한·중 수교 20년과 한·중 협력’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이날 오후 중앙일보 7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영호 전 총참모장의 전격적인 실각이 화제다. 권력투쟁으로 봐야 하나.
“이영호가 모든 직무에서 해임된 건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다. 북한군 고위인사는 병이 있다고 해서 파면되지 않는다. 보통 죽을 때까지 직책을 유지한다. 2010년 사망한 조명록 총정치국장도 그렇지 않았나. 그래서 이영호 실각과 관련해 권력투쟁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북한은 현재 군부의 힘을 줄이고 대신 내각의 권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교체는 김정일 사망 뒤 김정은 승계로 완성됐다. 그러나 북한의 최고 지도부 교체는 이영호 해임에서 보듯 아직 끝난 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김정은 체제는 불안정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김정은 체제는 안정적이다. 두 가지 점을 볼 때 그렇다. 첫째, 지난해 연말 김정일이 갑작스레 사망했을 당시 북한이 보여준 모습이다. 당시 북한 내부의 모든 활동과 업무가 지극히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이는 북한 지도체제가 상당히 안정돼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둘째, 지난 4월 북한이 말하는 ‘위성 발사 실험’이 실패했을 때 북한 정부가 보여준 모습이다. 발사 실패 후 곧바로 실패 사실을 인정했다. 북한 주민에 대한 자신, 내부 안정에 대한 자신이 없으면 쉽지 않은 모습이다.”

-김정은이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은 뭔가.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선군(先軍)정치’ 사상이다. 둘째, ‘핵 문턱’을 넘어섰다. 잇따른 핵실험으로 동북아 정치에서 차지하는 북한의 전략적 위상을 높였다. 셋째, 2002년부터 실시한 7·1 경제개선 조치다. 곡절이 많았지만 시장경제 요소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넷째, 한국은 물론 미국·일본과도 거래한다는 전방위 외교의 기본전략을 수립한 점이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지 반년이 넘었다. 김정일 체제와 비교할 때 달라진 점은.
“먼저 지난 4월 김일성 탄생 100주년 행사 당시 김정은이 공개 연설에서 인민 생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점이다. 그는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북한 역사상 지도자가 이처럼 명확하게 인민의 생활고에 대해 언급한 건 처음이다. 둘째, 위성 발사 실패 이후 북한이 보여준 변화된 태도다. 2009년엔 북한의 미사일 실험을 유엔 안보리가 비난하자 북한은 곧바로 핵실험을 하는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이번에도 유엔 안보리의 비난 뒤 3차 핵실험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북한은 후속 도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올해는 핵실험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셋째, 최근 북한 정부 관리들이 외자유치 활동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는 점이다. 이를 종합했을 때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선군정치’에서 경제를 우선하는 ‘선경(先經)정치’로 전략의 중점을 이동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3차 핵실험으로 맞서지 않고, 올해 핵실험 유보를 발표한 저의가 뭔가.
“우선 미국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2월 29일 북·미가 합의한 2·29 합의가 깨진 게 아니란 것이다(※2·29 합의에서 북한은 미국의 식량지원을 받는 대신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또 미국과 한국의 대선 결과를 지켜보고 움직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한·미는 북한이 6자회담 복귀 전에 미사일 실험 발사 중단, 추가 핵실험 중단,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외에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 복귀 허용’ 등과 같은 ‘3+1’의 선행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은 이번에 미사일이 아닌 위성 발사 실험을 했고, 핵실험을 유보한다는 계획을 밝힘으로써 ‘3+1’에서 0.5만을 깼다는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2.5+1’을 놓고 협상 여지가 있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가 북한에 개혁·개방을 권유해왔다. 북한은 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 그렇게 권유하고 있고, 조금씩 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정일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시(市)정부 측에선 그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저녁 일정을 공연 관람으로 잡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낮에 이어 밤에도 기업 탐방을 요구했다. 중국 예술가는 평양으로 초청할 수 있지만 중국 기업의 경험은 현장에서 봐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북한은 한때 중국의 개혁·개방을 수정주의라 비난했다. 그 다음엔 중국의 경험을 존중한다고 하다가 이제는 찬양한다고 말한다.”

-김정은이 관람한 공연에 짧은 옷차림의 북한 여성이 대거 등장해 관심을 끌었다. 김정은 체제가 개방 노선을 택할 것이라 보는가.
“그렇다. 이미 김정일 시대에 북한은 김일성 시대에 생각할 수 없는 시장경제 요소를 채택했다. 평양 시내 곳곳에 개인 운영 상점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이를 북한의 경제개혁이라 부른다. 김정은 시대엔 더 개방적으로 변할 것으로 본다. 4·15 연설에서 조선노동당의 총목표로 강성국가 건설과 함께 인민이 잘 살 수 있게 만들겠다고 언급한 것은 큰 변화다.”

-김정은 체제가 시작된 이후 북·중 고위급 교류가 거의 없다. 양국 관계가 나빠졌나.
“그건 아니다.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내부 문제에 총력을 쏟고 있어 외부 활동을 별로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 교체에 이은 지도부 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세대교체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은 6자회담 관련 문제에 대해 일치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양국 간의 일상 업무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김정은이 연내에 중국을 방문할 것으로 보나.
“예측하기 어렵다. 중·북 간 최고지도자 교류는 당 대 당 차원에서 이뤄져 절차가 간단하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실현될 것이다.”

-올가을 중국에선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린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덩샤오핑(鄧小平) 이래 중국은 한반도에 대해 양대 전략 목표를 갖고 있다. 첫째는 한반도 비핵화, 둘째는 한반도의 평화·안정이다. 현재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공포의 평화’다. 시진핑 시대에도 이런 전략 목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에선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에만 관심을 가질 뿐 비핵화 실현엔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한다. 그렇지 않다. 안정과 비핵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반도에 핵이 있는 한, 남북은 결코 안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내엔 ‘중·북 관계가 나빠지더라도 비핵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파’와 ‘중·북 관계 유지를 위해 북핵을 용인해야 한다’는 ‘전통파’ 간의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안다.
“북한 문제를 보는 중국인의 시각은 다양하다. 인터넷을 보면 일각에선 ‘김정일 만세’를 외치고, 다른 쪽에선 ‘김정일을 때려잡자’고 말한다. 민간에 전략파와 전통파 구별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이 중국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중국이 북한에 할 말이 있을 때는 문을 닫고 말한다. 그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후에서 북한에 하는 발언 수위는 한국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양시위 1954년 출생. 중국 농민들의 바람인 ‘비가 내리기를 희망한다(希望下雨)’는 뜻에서 ‘시위(希雨)’란 이름을 얻었다. 문화혁명 직후 치러져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는 1977년 대입 시험을 뚫고 랴오닝(遼寧)대 사범대학 영어과를 나왔다. 그가 현재 몸담은 중국국제문제연구소는 외교부 산하 기구로 중·장기 전략 문제를 주로 연구한다. 2005~2007년엔 미국 스탠퍼드대 방문학자로서 아태 안보문제를 연구했다.

“북한은 최고지도자 교체가 완성된 것이지, 최고 지도부 교체가 완성된 건 아니다.”
북한군 최고 실세로 통하던 이영호 전 총참모장의 갑작스러운 낙마를 설명하며 양시위(楊希雨·58·사진) 중국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이 한 말이다. 그는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을 기초한 장본인이다. 당시 6자회담의 중국 측 부대표로 활약했다. 외교부 조선반도사무판공실 주임을 역임하는 등 한반도 전문가로 꼽힌다. 그는 지난 18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GK전략연구원(이사장 배정호)이 주최한 ‘한·중 수교 20년과 한·중 협력’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이날 오후 중앙일보 7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영호 전 총참모장의 전격적인 실각이 화제다. 권력투쟁으로 봐야 하나.
“이영호가 모든 직무에서 해임된 건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다. 북한군 고위인사는 병이 있다고 해서 파면되지 않는다. 보통 죽을 때까지 직책을 유지한다. 2010년 사망한 조명록 총정치국장도 그렇지 않았나. 그래서 이영호 실각과 관련해 권력투쟁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북한은 현재 군부의 힘을 줄이고 대신 내각의 권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교체는 김정일 사망 뒤 김정은 승계로 완성됐다. 그러나 북한의 최고 지도부 교체는 이영호 해임에서 보듯 아직 끝난 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김정은 체제는 불안정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김정은 체제는 안정적이다. 두 가지 점을 볼 때 그렇다. 첫째, 지난해 연말 김정일이 갑작스레 사망했을 당시 북한이 보여준 모습이다. 당시 북한 내부의 모든 활동과 업무가 지극히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이는 북한 지도체제가 상당히 안정돼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둘째, 지난 4월 북한이 말하는 ‘위성 발사 실험’이 실패했을 때 북한 정부가 보여준 모습이다. 발사 실패 후 곧바로 실패 사실을 인정했다. 북한 주민에 대한 자신, 내부 안정에 대한 자신이 없으면 쉽지 않은 모습이다.”

-김정은이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은 뭔가.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선군(先軍)정치’ 사상이다. 둘째, ‘핵 문턱’을 넘어섰다. 잇따른 핵실험으로 동북아 정치에서 차지하는 북한의 전략적 위상을 높였다. 셋째, 2002년부터 실시한 7·1 경제개선 조치다. 곡절이 많았지만 시장경제 요소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넷째, 한국은 물론 미국·일본과도 거래한다는 전방위 외교의 기본전략을 수립한 점이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지 반년이 넘었다. 김정일 체제와 비교할 때 달라진 점은.
“먼저 지난 4월 김일성 탄생 100주년 행사 당시 김정은이 공개 연설에서 인민 생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점이다. 그는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북한 역사상 지도자가 이처럼 명확하게 인민의 생활고에 대해 언급한 건 처음이다. 둘째, 위성 발사 실패 이후 북한이 보여준 변화된 태도다. 2009년엔 북한의 미사일 실험을 유엔 안보리가 비난하자 북한은 곧바로 핵실험을 하는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이번에도 유엔 안보리의 비난 뒤 3차 핵실험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북한은 후속 도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올해는 핵실험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셋째, 최근 북한 정부 관리들이 외자유치 활동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는 점이다. 이를 종합했을 때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선군정치’에서 경제를 우선하는 ‘선경(先經)정치’로 전략의 중점을 이동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3차 핵실험으로 맞서지 않고, 올해 핵실험 유보를 발표한 저의가 뭔가.
“우선 미국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2월 29일 북·미가 합의한 2·29 합의가 깨진 게 아니란 것이다(※2·29 합의에서 북한은 미국의 식량지원을 받는 대신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또 미국과 한국의 대선 결과를 지켜보고 움직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한·미는 북한이 6자회담 복귀 전에 미사일 실험 발사 중단, 추가 핵실험 중단,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외에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 복귀 허용’ 등과 같은 ‘3+1’의 선행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은 이번에 미사일이 아닌 위성 발사 실험을 했고, 핵실험을 유보한다는 계획을 밝힘으로써 ‘3+1’에서 0.5만을 깼다는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2.5+1’을 놓고 협상 여지가 있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가 북한에 개혁·개방을 권유해왔다. 북한은 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 그렇게 권유하고 있고, 조금씩 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정일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시(市)정부 측에선 그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저녁 일정을 공연 관람으로 잡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낮에 이어 밤에도 기업 탐방을 요구했다. 중국 예술가는 평양으로 초청할 수 있지만 중국 기업의 경험은 현장에서 봐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북한은 한때 중국의 개혁·개방을 수정주의라 비난했다. 그 다음엔 중국의 경험을 존중한다고 하다가 이제는 찬양한다고 말한다.”

-김정은이 관람한 공연에 짧은 옷차림의 북한 여성이 대거 등장해 관심을 끌었다. 김정은 체제가 개방 노선을 택할 것이라 보는가.
“그렇다. 이미 김정일 시대에 북한은 김일성 시대에 생각할 수 없는 시장경제 요소를 채택했다. 평양 시내 곳곳에 개인 운영 상점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이를 북한의 경제개혁이라 부른다. 김정은 시대엔 더 개방적으로 변할 것으로 본다. 4·15 연설에서 조선노동당의 총목표로 강성국가 건설과 함께 인민이 잘 살 수 있게 만들겠다고 언급한 것은 큰 변화다.”

-김정은 체제가 시작된 이후 북·중 고위급 교류가 거의 없다. 양국 관계가 나빠졌나.
“그건 아니다.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내부 문제에 총력을 쏟고 있어 외부 활동을 별로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 교체에 이은 지도부 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세대교체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은 6자회담 관련 문제에 대해 일치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양국 간의 일상 업무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김정은이 연내에 중국을 방문할 것으로 보나.
“예측하기 어렵다. 중·북 간 최고지도자 교류는 당 대 당 차원에서 이뤄져 절차가 간단하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실현될 것이다.”

-올가을 중국에선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린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덩샤오핑(鄧小平) 이래 중국은 한반도에 대해 양대 전략 목표를 갖고 있다. 첫째는 한반도 비핵화, 둘째는 한반도의 평화·안정이다. 현재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공포의 평화’다. 시진핑 시대에도 이런 전략 목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에선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에만 관심을 가질 뿐 비핵화 실현엔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한다. 그렇지 않다. 안정과 비핵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반도에 핵이 있는 한, 남북은 결코 안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내엔 ‘중·북 관계가 나빠지더라도 비핵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파’와 ‘중·북 관계 유지를 위해 북핵을 용인해야 한다’는 ‘전통파’ 간의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안다.
“북한 문제를 보는 중국인의 시각은 다양하다. 인터넷을 보면 일각에선 ‘김정일 만세’를 외치고, 다른 쪽에선 ‘김정일을 때려잡자’고 말한다. 민간에 전략파와 전통파 구별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이 중국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중국이 북한에 할 말이 있을 때는 문을 닫고 말한다. 그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후에서 북한에 하는 발언 수위는 한국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양시위 1954년 출생. 중국 농민들의 바람인 ‘비가 내리기를 희망한다(希望下雨)’는 뜻에서 ‘시위(希雨)’란 이름을 얻었다. 문화혁명 직후 치러져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는 1977년 대입 시험을 뚫고 랴오닝(遼寧)대 사범대학 영어과를 나왔다. 그가 현재 몸담은 중국국제문제연구소는 외교부 산하 기구로 중·장기 전략 문제를 주로 연구한다. 2005~2007년엔 미국 스탠퍼드대 방문학자로서 아태 안보문제를 연구했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scyo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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