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없는 살인사건' 배심원들 새벽까지 격론한 뒤 결론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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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조선족 이모(34ㆍ여)씨였다. 이씨는 충격적인 내용을 제보했다.

자신과 동거하던 일용직 굴삭기 기사 박모(41)씨가 직장 동료 조모(35)씨를 산 채로 땅에 묻었다는 얘기였다.

경찰은 박씨를 검거해 추궁하기 시작했다. 경찰의 압박이 계속되자 박씨는 “포크레인 엔진오일을 갈던 박씨가 미끄러져 4m 구덩이로 빠졌는데 내가 굴삭기로 묻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박씨가 지목한 경기도 용인의 한 포도밭으로 갔다. 시신을 찾기 위해 포도밭 인근을 모조리 파헤쳤다. 살인사건의 경우 ‘직접 증거’인 시신이나 살인의 도구를 찾지 못하는 이상 나머지 증거는 모두 ‘정황 증거’에 그친다. 그래도 시신을 찾을 수는 없었다. 경찰은 박씨가 엉뚱한 장소를 지목했다고 판단했다.

시신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인사건은 검찰로 넘어갔다. 서울중앙지검은 정황 증거만으로도 박씨에게 살인 혐의가 충분하다고 보고 박씨를 기소했다. 박씨가 사망한 조씨의 카드로 차량을 구매한 뒤 보름 만에 되팔고 중국으로 출국했고, 둘 사이에 1200만원 이상의 돈 거래가 있어 살인 동기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 차량 트렁크에 있던 조씨의 옷 가지를 태운 것을 볼 때 정황상 살인 혐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18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박씨의 운명은 이제 9명의 배심원들에게 달려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 최동렬)의 심리로 16일부터 하루 6시간씩 3일간 진행된 국민참여재판의 마지막 날이었다.

박씨 측은 배심원을 설득해야 했지만, 검찰의 공세가 강했다. 검찰은 “제보자 이씨의 증언을 토대로 한 증거수집 결과와 박씨가 중국 출국 준비를 서두른 행적 등을 볼 때 박씨가 살인을 한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피의자 측은 ‘무죄’를 주장하며 반격에 나섰다. 살인을 자백한 것은 경찰의 강압과 회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박씨는 재판 도중에 손을 들고 일어섰다. “당시 아들의 중학교 입학식이 있었다. 수사에 협조하면 열흘에서 보름가량 시간을 준다고 해 자백을 했다“며 “경찰이 욕설과 폭행도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사망했다는 조씨가 분명 중국에 있다고도 말했다. 돈 거래는 같이 준비하던 ‘중국위조여권’ 사업 때문이라고 했다.
박씨 측 변호인도 “이 사건은 시신이라는 직접 증거가 없이 이씨의 진술과 정황 증거뿐으로 기소한 것으로 박씨는 무죄”라고 강조했다.

9명의 배심원은 검사와 변호인, 피의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6시간 동안 법정 공방이 계속됐다.

마지막 순간.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유죄 의견을 냈다. 피고인의 최후변론 후 평의에 들어간 배심원들이 이튿날 새벽까지 격론을 벌인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박씨의 범행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도 배심원의 평결을 받아들였다.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매장 장소가 밝혀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핵심 증언의 신빙성이 강력한데다 가까운 사이인 피해자가 사라졌음에도 피고인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 등의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일부 증인의 믿기 어려운 진술을 배제해도 유죄가 인정된다”며 ‘시신없는 살인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한영익 기자

국민참여재판=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이 내린 유죄ㆍ무죄에 대한 평결과 양형에 관한 의견은 ‘권고적 효력’만 있다. 미국과 달리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배심원의 평결과 다른 선고를 할 때 판사는 피고인에게 배심원의 평결 결과를 알리고, 평결과 다른 선고를 한 이유를 판결문에 분명히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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