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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고난의 유익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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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철환
JTBC 콘텐트본부장

한 해에 두 번 ‘빙의’를 한다. 원한이 맺혀서가 아니라 옷장에 옷들이 쌓여서다. 사내엔 바빠서 연애도 못하고 게을러서 잘 씻지도 않는 독거청년들이 더러 있다. 그들에게 헌옷을 나눠주는 행사인데 단순한 옷장정리와는 풍경이 다르다. 소문을 들었는지 체격이 나와 비슷한 신입사원 중에 빙의 언제 하느냐고 묻는 녀석도 있다.

 빙의(憑依)의 원뜻은 두 가지. ‘다른 것에 몸이나 마음을 기댐’, ‘영혼이 옮겨 붙음’. 내가 주관하는 빙의에는 종교적 색채나 정치적 계산이 없다. 그저 일종의 취미생활이다. 세월에 연민이 누적된 결과이므로 샤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 그 뿌리다. 갖다 붙이기 잘한다고 비난해도 화 안 난다. 웃으며 넘길 참이다.

 받는 입장에선 혹 꺼림칙하지 않을까. 해석하기 나름이다.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남은 선배의 옷에는 끈기의 땀방울이 배어 있다. 물려 입는 순간 연륜의 향기가 후배에게로 살그머니 이동하겠지. 낙관의 삶답게 불행의 얼룩은 이미 세탁된 걸로 추정한다.

 옷을 통해 옮겨가는 건 영혼이 아니라 영감이다. 일상의 나락에 가라앉은 창의력이 어떤 계기로든 숨을 쉬며 기지개를 켠다면 좋은 일 아닌가. 후배들이 낯익은 옷을 입고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면 온종일 마음이 흐뭇하다. 이런 때야말로 일터가 놀이터다.

 아시아재단 한국대표인 피터 M 벡이 기고를 했는데 한국어 표현 중 가장 좋아하는 말이 ‘산 넘어 산’이란다(중앙SUNDAY 6월 17일). 등산을 즐기는 모양이다. 하나 궁금하다. ‘산 넘어 산’이 고행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썼을까. 영어에 맛들일 무렵 내가 발음하기 좋아했던 말은 ‘If I were you’다. 입술 모양도 귀엽고 의미 또한 정겹다. ‘내가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내가 너라면’ 무슨 느낌을 가질까. ‘빙의’놀이가 시작된 지점이 바로 거기였을 성싶다.

 처지가 다른 사람에게로 상상이 벽을 타고 넘는다면 그것이 빙의다. 사업 실패에 경매로 집까지 날린 가장, 자식이 학교폭력으로 숨막혀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부모, 3번 구속, 3번 무죄였다가 4번째 구속된 무소속 의원, 파업을 끝내고 복귀한 조합원들로부터 동료로 인정 못하겠다며 외면당한 시용기자.

 뉴스는 빙의할 소재들로 넘실댄다. 요즘 대통령 출마선언이 요란한데 슬로건도 십인십색이다. 만약 내가 저 언저리에 있다면 슬로건은 뭐가 좋을까. ‘대한민국 감동연출’은 어떨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때 권세를 누리다가 감옥으로 향하는 낯익은 얼굴로 빙의하는 순간 상념은 푸념으로 바뀐다. “가짜는 어디에나 있어도 공짜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왜 몰랐을까. 그때 멋지게 거절했으면 지금 편안할 텐데.” 권력과 인기는 왕관 같은 것이다. 쓰고 있을 때는 화려해 보이지만 좀 지나면 머리가 아프다. 결국은 벗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빙의시간표를 운행하다 보면 지루할 틈도 없다.

 빙의 장면에도 배경음악은 보약이다. 오늘은 이 노래가 어떨까.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돈보다 더 귀한 게 있는 걸 알게 될 거야 사랑놀인 그다지 중요하진 않은 거야.” 이문세의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은 ‘일밤’을 연출할 때 한동안 주제가로 깔았던 노래다. 여기서 두 개의 단어에 밑줄을 긋자. ‘마음먹다’와 ‘귀하다’. 밥은 늘 먹으면서 마음은 잘 안 먹는 게 문제다. 밥도 마음도 제때 가려서 먹는 게 좋다. 나잇값이 별건가. 나이도 제대로 먹어야 귀하게 대접받는다.

 귀한 것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천한 것일 수도 있고 흔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흔한 것이 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기도 흔하고 물도 흔하지만 그것들은 천하지 않고 귀한 존재들이다. 흔한 게 귀한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세상은 음악소리로 가득 차게 된다.

 친구의 얼굴이 오늘은 어둡다. 인생이 고난의 행군이라며 쓸쓸하게 웃는다. 그에게 고난의 유익함을 들려주고 싶다. 딱 세 문장이다. 고난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깨달음을 준다. 고난은 진짜 친구가 누구인지를 가려준다. 집단 고난은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고난의 기억은 감사의 목록을 또렷하게 되짚어 준다. 지금 이 단란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냐. 오랜 빙의 체험에서 우러난 담백한 지혜다.

주철환 JTBC 콘텐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