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에 힘들여 오르면 다른 꼭대기가 보여...그러면 또 그쪽에 가고 싶어지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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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호 21면

조총련 학교 나온 의사 출신 ... 8·15 특집 단골
양방언.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음악은 웬만해선 피해갈 수 없다. 드라마·영화·다큐멘터리·CF 등 각종 영상매체의 삽입곡으로 심심찮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동양의 야니’로 불릴 만큼 진취적이고 웅장한 스케일로 가슴을 후련하게 만드는 그의 음악은 2000년대 이후 한국인의 역동적인 기운을 표현하는 영상에 어김없이 등장했다. 태평소·장구·꽹과리 등 국악기가 뿜어내는 우리 정서의 리듬과 선율을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화음으로 웅장하게 떠받치는 것. 양방언 퓨전 국악의 스타일이다.

‘여우樂 페스티벌’ 예술감독 맡은 양방언

- 큰 행사의 예술감독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지금껏 주로 연주자로 음악에 참여해 왔지만 제안을 받고 보니 다른 역할이 보였다. 내가 참여함으로써 여우락이 활성화되고, 지난해까지 보러 왔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내가 뮤지션이니 다른 출연진과도 뮤지션의 관점에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고, 그 성과가 마지막 날 모두가 어울리는 여우락 콘서트에서 나올 것 같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국악 축제를 총괄하는 일이 버겁지 않나.
“안호상 국립극장장의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전문 국악인이 아니라고 했더니 오히려 다른 관점을 원한다더라. 나의 관점이나 제안이 페스티벌에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게 하는 창문이 되면 좋겠다. 신선한 공기만으로도 많은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뮤지션들은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들이라 좋은 환경이 마련되면 자연스럽게 연주가 좋아진다.”

-처음으로 야외공연도 편성했다.
“여름 축제라 야외공연이 특히 중요하다. 축제에서는 그 장소의 공기조차 추억이 된다. ‘아, 지난해 여름 야외에서 이런 공연을 봤었지’ 하는 추억을 갖게 되는 것이 페스티벌의 매력이다. 나도 여름 페스티벌을 좋아해 자주 관객으로 간다. 나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즐거움을 느끼는지, 흥분하고 신이 나는지를 생각했을 때 그 장소에서만 얻을 수 있는 느낌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늘 향한 울림이 정말 좋은 태평소에 매료
양방언은 30대에 한국 국적으로 전환해 98년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조총련학교를 다녔고 의사가 되었다가 뮤지션의 길로 전향한 극적인 인생사가 알려지면서 자칭 ‘광복절 아티스트’라 할 만큼 광복절 특집방송의 단골 메뉴가 되기도 했다.
-‘재일 한국인 의사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음악적 성과가 가려지는 건 아닌가.
“음악이 좋은 게 먼저고, 알고 보니 이런 인생이었다는 순서면 좋겠다.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재일 한국인이라 고통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이란 누구에게나 있다. 상황이 그렇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을 많은 가능성이 있다. 내 경우 음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음악에도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세의 문제다. 내가 보고 싶은 방향, 표현하고 싶은 건 위쪽이다. 지금껏 겪어온 것을 계속 가져가기보다는 그보다 위를 향하고 싶다. 힘들여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다른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면 또 그쪽에 가고 싶어지는 성격이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향하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모여 같이 만든 음악으로 힘을 얻고, 또 주고 싶다.”

-국악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우리 타악은 특이하다. 중국·일본의 타악은 직선적이지만 우리 것은 복잡하다. 파워도 있고 인텔리전스도 있는, 양쪽을 다 가진 느낌이다. 선율악기 중에는 내 음악에 담고 싶은 것이 태평소였다. 내가 가진 우리나라의 이미지와 딱 맞았다. 활발하고 소리도 크고, 하늘을 향한 울림이 정말 좋아서 태평소를 많이 썼다.”

즐거운 추억 만드는 장소에 우리 음악 울리게
일본에서 키보디스트로 자리잡은 후 90년대 중화권에 진출한 양방언은 몽골·티베트 등의 민속음악을 국악보다 먼저 접했다. 90년대 후반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팝 음악에 클래식, 다양한 민속악기까지 접목시킨 크로스오버 음반을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녹음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했다.
-국악 이전에 아시아의 다양한 민속음악과 접했다.
“중화권에서 일을 해보니 내가 모르는 것이 있더라. 문화도 음악도 CD만으로는 잡을 수 없는 실감이랄까, 현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접하면서 ‘클래식과 팝·재즈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많은 것이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런 느낌이 너무 즐거워 그쪽 뮤지션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사람과 음악 사이에도 인연이 있어서 그 사람 고유의 필터를 통하면 또 다른 음악이 나온다. ‘내 음악은 이것’이라 정의하기보다 순간의 느낌과 그때 어울리는 사람들과 함께 태어나는 것이 내 음악인 것 같다.”

-민속음악과 서양음악의 조화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한 쪽에 깊이 몰입하지 않고 중간에 있으려 한다. 뉴트럴한 ‘양방언’의 입장에서 많은 것을 흡입해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 중요한 것은 연주자들이다. 이해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연주자들이 그 자리에 있으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40세 가까이에 처음 한국 활동을 시작했으니 국악의 정서가 객관적으로 보일 것 같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 ‘천년학’을 맡기면서 ‘당신이 느낀 한국 정서를 솔직하게 표현하라. 그러려면 우선 많은 것을 느끼라’고 했다. 그래서 촬영지를 많이 쫓아다녔다. 그 모든 걸 섭렵한 후 내 생각을 표현하라기에 국악에 런던 오케스트라까지 끌어들였다. 한국인의 정서에 한도 있고 흥도 있지만 그것으로 끝내면 재미없지 않나. 또 다른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여우락에서도 내 역할은 그걸 끌어내는 거다. 고정되지 않은 순간순간의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국악을 지루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직 많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원인이 어딘가 있을 수 있고 하나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그걸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우리가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 축제에 가면 뭔가 재미있을 거란 기대가 있지 않나. 즐거운 추억을 만드는 장소에서 울리는 소리가 우리 음악이고, 거기 우리 악기가 있다면 이상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양반언
1960년 일본 출생. 조총련계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팝음악에 매료돼 밴드활동을 시작했다.아버지의 뜻에 따라 니혼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결국 뮤지션으로 전향했다.일본의 전설적인 록가수 하마다 쇼고의 키보드세션으로 활동을 시작해 90년대 홍콩의 록밴드 ‘비욘드’ 프로듀서를 시작으로 드라마 ‘정무문’,청룽(成龍)의 ‘썬더볼트’ 영화음악을 맡으며 중화권에서도 입지를 굳혔다.한국 국적으로 전환해 98년 처음 고국땅을 밟은 이후 국악을 접목해 작곡한 ‘Prince of Cheju’ ‘Frontier!’ 등은 2000년대 퓨전 국악의 교과서가 됐다. 2007년 영화 ‘천년학’ 음악으로 영화평론가협회상,2009년엔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로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을 수상했다. 총 8장의 솔로음반을 냈다. 현재 뮤지컬 ‘몽유도원도’ 작곡과 중국에서의 영화음악 등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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