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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위기에 매출 11% 늘린 무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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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원장

유럽 국가의 신용등급이 무더기로 강등되고 있다. 무디스 기준으로 지난해 이후 그리스와 스페인의 신용등급이 8단계, 이탈리아가 4단계 강등되는 등 유럽 재정위기 국가의 신용등급이 수직 낙하하고 있다. 신용등급 강등 도미노 현상은 1997년 외환위기에 직면했던 아시아 국가도 익히 경험한 바 있다. 당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기준으로 태국은 4개월간 4단계, 말레이시아는 8개월간 5단계, 인도네시아는 15개월간 13단계, 한국은 2개월간 10단계가 강등됐다. 아시아 국가의 신용등급은 그 후 꾸준한 회복세를 보였으나 하향 속도와 상향 속도 간 차이는 무려 10배에 달한다. 97년 이후 무디스와 S&P에 의해 4개국의 신용등급이 1단계 하향되는 데에는 평균 1.5개월이 걸렸지만 상향 조정에는 15개월이 걸렸다. 신용등급을 올릴 때는 신중하지만 내릴 때는 과감한 신평사의 등급 조정 행태가 숫자로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난해 8월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직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S&P와 무디스가 75년 이후 평가한 국가신용등급 기록을 추적해 기사화했다. 이에 따르면 S&P는 지난 35년간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빠진 15개국 중 12개국에 대해 디폴트 발생 1년 전까지 B등급 이상을 부여했다. WSJ는 B등급이 ‘1년 내 디폴트 확률이 약 2%인 국가신용등급’이라는 S&P의 설명을 덧붙이면서 B등급이던 15개국 중 80%가 1년 후 디폴트에 직면했으니 터무니없이 위험을 낮게 평가했다고 비판했다. 무디스도 13개 위기국 중 11개국에 대해 디폴트 1년 전까지 B등급 이상을 부여했다.

  최근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은 유럽 은행에 대한 신평사의 무더기 등급 강등에 대해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비판의 초점은 신평사의 뒷북성 등급 조정으로 모아진다. 사태가 악화되기 전 사전적으로(Ex Ante) 경고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악화된 이후에야 등급을 대거 하향하는 후행적(Ex Post) 등급 조정에 대한 비판은 물론, 잘못된 신용평가를 해도 평가에 대한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비난까지 가세하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며 오히려 신평사의 매출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아이러니다. 국제 금융시장이 어려움을 겪었던 2011년, 무디스의 매출은 전년에 비해 11%, S&P의 매출은 4% 증가했다. 금융위기 이후 경기부양과 필요자금 조달을 위해 전 세계 국가와 은행·기업의 채권 발행이 급증했고 채권 발행을 위해서는 차입자에게 신용등급 평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제 채권시장에서는 채권을 발행할 때마다 2개 이상의 주요 신평사로부터 등급을 부여받아야 한다. 미국의 경우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보험 등 기관투자가들의 투자 대상 채권을 국가가 공인한 9개 신평사로부터 일정 등급 이상을 부여받은 채권으로 제한하고 있다. 투자자가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신평사들의 등급 평가를 요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요 신평사로 차입자가 쏠리는 현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시계를 되돌려 보면 S&P·무디스·피치의 기원은 출판기업에 가깝다. S&P는 헨리 바넘 푸어가 1860년 『미국 철도기업 매뉴얼』이라는 사실상 최초의 철도기업 분석 책자를 발간한 것이 시초다. 무디스도 출판업자였던 존 무디가 1909년 『철도채권의 투자분석』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등급 체계를 도입했다. 신평사의 기원이 채권, 주식 업무와 관련된 금융회사가 아니라 어느 정도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출판사에 가까운 기업이었다는 점은 신평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효용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특정 국가나 기업의 정보를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은 내부자다. 따라서 신평사가 소수의 애널리스트를 통해 광범위한 국가와 산업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 내부자는 표피적인 평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잣대와 고유의 분석 방법을 통해 다른 국가, 다른 기업과 객관적으로 비교할 때 평가 대상자의 상대적인 강점과 취약점을 볼 수 있다. 내부자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자료만 나열하기 십상인 차입자의 기업공개(IR) 자료보다 신평사의 보고서가 투자자에게 더 신뢰성 있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제 채권 발행시장에서 투자자 미팅 등 로드쇼 과정은 생략할 수 있어도 신용등급 평가는 건너뛸 수 없는 절차가 된 것이다.

 세계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며 드러난 것처럼 서브프라임 모기지채나 구조화 상품 등에 대한 부실한 평가와 AAA 등급의 남발 등 신평사의 과실은 분명히 많았고 제도적인 보완도 필요하다. 제한된 인원으로 광범위한 영역을 담당하는 신평사의 분석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차입자와 투자자 사이에서 신용 위험을 평가하고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은 신평사이건 누구이건 간에 해야 할 일이다. 신평사의 분석을 맹신할 필요도 없지만 그들의 고유한 역할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도록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