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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은 어떤 존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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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직
변호사

직업상의 이유로 법원이나 검찰청을 자주 드나들면서 제복을 입은 젊은 사람이 짐을 나르거나 서류를 정리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처음에는 “저 사람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하고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병역법의 규정에 의해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신체 혹은 그 밖의 다른 이유로 군인으로 근무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일부 사람들에게 군인으로 복무하게 하는 대신 공공기관 등에 일정 기간 근무하게 함으로써 병역의무를 대신하게 하는 제도다.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고, 이에 따라 병역법은 국방의 의무를 하여야 하는 사람의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데 기준에 맞지 않는 일부를 군 복무 대신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병역법은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것과 군에서 복무하는 것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즉 양자 모두 개인이 공공을 위하여 근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당연히 뒤따르게 될 것이다. 과연 개인은 일정한 정도 공공을 위하여 의무적인 근무를 하여야 하는가. 군인도, 공익근무요원도 되지 않는(아니 될 수 없는) 장애인이나 여자들은 공익에 복무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공익근무요원들이 하는 일들은 아주 심한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이나 여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면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인’ 의문이 생기게 된다. 개인과 공공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개인과는 다른, 개인을 넘어서는, 바람직한 공공이라는 별도의 존재가 있고, 개인은 이러한 공공을 위하여 헌신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공공은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가.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해 극도의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북한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의문을 불온시할 수만은 있는가.

 오래전에 읽은 소설 중에 개인과 공공에 관한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부분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를 거치는 과정에서 생존했던 한 무지렁이 백성에게 ‘국가와 민족’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대한제국 말기에 조병갑으로 대표되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와 일제 식민지의 최말단에서 우리에게 극심한 탄압을 가하는 ‘나카무라 순사’는 그 백성에게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백성에게는 그래도 같은 민족인 조병갑이라는 탐관오리에게 가렴주구를 당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인가.

 흔히 서양은 근대화 과정에서 밑에서부터의 혁명을 거침으로써 개인의 자아가 형성된 반면 우리와 일본 등 동양은 이러한 혁명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우리만 하더라도 대한제국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전쟁을 겪고 산업화 과정을 지나오는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이 주도하는 국가 형성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근대화 과정을 겪는 과정에서 국민들은 동원의 대상이 됨으로써 개인은 공공을 위한 하나의 객체로 전락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유교적인 충·효의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어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경우에 따라선 대립적이기도 한 개인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국가나 가족, 학교, 지역 등의 집단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는 주체적인 개인이 모여 바람직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발성을 억누르고, 개인이 집단을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에 어긋난다고 할 것이다.

 정치적인 수사가 아닌 참된 의미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든, 올바른 나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든 개인과 국가와 민족, 개인과 공공이라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한 성원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의무인 것 같다.

이영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