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재판 기록에 서민의 절망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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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대법관 전수안(60). 그는 어제 퇴임식으로 34년간의 판사 생활을 마감했다. 사실 전수안의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었던 그는 1호 여성 대법관(김영란 현 국민권익위원장)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후배인 김 위원장보다 2년 늦게 대법관이 된 뒤 묵묵히 재판 업무에 몰두해 왔다.

 전수안이 침묵 밖으로 나온 건 지난달 29일이었다. 퇴임기념 논문집 헌정식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은 것이다. 회장을 맡았던 특별소송실무연구회가 마련한 자리였다. 그는 먼저 여성이란 것, 그리고 소장 판사 시절 몇 건의 영장을 기각한 뒤 인사이동에서 받았던 ‘특별한 취급’이 자신을 어떻게 바꿨는지 이야기했다.

 “남성 법관들만으로 구성된 법원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 오는 동안 자연스럽게 비슷한 처지의 소수자 계층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법원 내에서의 그러한 (인사이동) 경험은 개인의 기본권 보장에 민감한 법관으로 눈뜨게 해주었습니다. 법관인 제가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한다면 일반인은 어떤 일을 당할 수 있는 사회인가, 우리 사회가….”

 그러나 전수안이 판사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든 것은 서른다섯 살 때의 가정법원 소년 단독 판사 경험이었다. 소년 단독 판사는 형사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소년범들과 맞부딪치는 자리다.

 “집도 절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 자녀들의 소외되고 절박한 사연은 나름의 여유를 누리며 편하게 살던 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절망하게 만들었고 재판이 사람을 위한 제도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재판기록의 이면에 맥박 치는 서민들의 꿈과 절망을 법관의 시각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 절실한 꿈과 절망을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열정이 법조인의 기본이다, 라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판사 전수안을 각성시킨 건 못 가진 자에 대한 가진 자의 죄책감이었다. 그의 달라진 시각은 대법원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2006년 7월 그의 대법관 취임으로 ‘독수리 5형제’가 골격을 갖췄다. 독수리 5형제, 아니 정확히 말해서 독수리 5남매는 노무현 정부 때 차례로 임명된 진보 성향 대법관 다섯 명을 말한다. 김영란·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은 고요하던 대법원에 토론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들이 전향적인 소수의견을 내면서 그간 외면당했던 소수자의 목소리가 울림을 얻었다. 토론의 무게중심은 왼쪽으로 이동했다.

 전수안은 어제 퇴임사에서 “독수리 5형제가 아니라 저 자신의 수많은 판결로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숱한 밤을 지새우게 했던 고민들이 독수리란 단어 하나로 압축되는 게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수안은 통념과 시스템에 억압받는 개인의 삶에서 두 눈을 떼지 않았다. 지난달 전원합의체 주심을 맡아 “자살한 군인도 직무 수행과 관련이 있다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는 보충의견에서 “군대 내 자살을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나약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고 했다.

 이제 ‘Mrs. 소수의견’의 퇴장은 한국 법치주의에 큰 숙제를 남겼다. 남성·서울대·판사·기수…. 주류 중심의 대법원 구성은 토론의 중심을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놓을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에서 소수자의 감수성이 사라질 때 사회적 약자들은 법정 밖의 정의를 찾아 거리를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전수안이 동료·후배 판사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더 분발하라는 격려였다. 그날 그는 “이승에서의 정의는 늘 반쪽이라지만 우리가 그 반쪽짜리 정의라도 세우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물음과 함께 알피니즘(산악등반)의 거장 라인홀트 메스너를 묘사한 작가 김훈의 글로 자신의 말을 끝냈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