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나홀로 연설문' 행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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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지난해 12월 18일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 이부스키시에서 숙소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 당시 두 사람은 양국 우호를 다짐했다.[중앙포토]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일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하고 화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사 재론은 없다"던 지난해 7월 제주 정상회담을 뒤집는 폭탄선언이었다. 기겁을 한 외교통상부는 배경을 알기 위해 법석을 떨었다.

한 외교 소식통은 "기념사 작성 과정에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나 정동영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장과의 협의가 없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대통령이 사실상 직접 작성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민감한 외교 현안인 대일 문제에서 대통령의 '나 홀로 연설' 행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편으론 '속 시원하다'는 박수도 있지만 '신중해야 한다'는 주문도 만만치 않다.

지난 23일 노 대통령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둘러싼 상황도 비슷하다. 한 정부 당국자는 "글 작성 과정에 외교부는 거의 역할을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청와대 김만수 대변인은 24일 "노 대통령이 글을 썼지만 참모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나온 결과물"이라며 "외교부 장관도 그 참모에 속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3.1절 기념식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우리 국민 가슴에 상처 주는 발언을 국가적 지도자의 수준에서는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를 겨냥한 말이다. 당시 외교부의 한 국장은 "고이즈미는 아니다"라고 언론에 설명했다. 대통령이 직접 추가한 이 대목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이 간부는 내부에서 크게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대통령의 독주'에 대해 24일 열린 외교부 정책자문위에서 한 참석자는 "대통령이 더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 한 마디에 장관이 허둥지둥 나서 뒷수습하는 모습은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도 "도광양회(韜光養晦.드러내지 않고 실력과 힘을 기른다는 뜻)라는 중국의 외교정책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며 "대통령의 발언에 문제는 없는지, 옳은 길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안성규 기자

***일본 측에 담화 배경 설명

정부는 24일 오후 우라베 도시나오(卜部敏直) 주한 일본대사 대리를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로 불러 전날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배경과 내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박준우 외교부 아태국장은 우라베 대사 대리를 만난 자리에서 "일본 측이 성의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한.일 양국 간 외교 경색을 푸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정부의 한 당국자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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