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근대화 주역 정주영회장의 타계

중앙일보

입력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이 21일 밤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鄭전명예회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 발전사와 발자취를 함께 해온 산 증인이자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새삼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투철한 기업가 정신으로 오늘의 현대를 일궈냈으며, 불모지인 한국의 건설.조선산업을 세계 일류로 키우고 포니 신화를 바탕으로 자동차산업을 세계 5위로 성장시켜 한국 경제가 성공적으로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소양댐.경부고속도로.서산만에서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항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그의 땀과 숨결이 스며있다. '하면 된다' 는 그의 성공담은 한국의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는 서울올림픽을 유치, 한국을 세계에 알린 체육인이기도 했으며 10년이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민간주도의 경제시대를 여는 데 한몫 했다.

최근 대북(對北)경제협력 사업을 통해 남북화해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한 그의 공(功)도 결코 과소평가돼서는 안될 일이다. 5백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 그의 모습은 세계인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이렇듯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 최고 갑부의 반열에 올랐던 그가 숱한 이의 아쉬움 속에서 영욕(榮辱)의 생을 마감했다.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하면 그가 남긴 정신과 교훈을 한국 경제와 현대가 위기에서 벗어나 또 한차례의 도약을 이루는 발판으로 삼느냐 하는 점이다.

그가 한국 경제 발전에 남긴 숱한 공적의 뒷면에는 우리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교훈들이 적잖게 숨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행히도 그가 일군 현대그룹은 현재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의 시발점은 그의 정치로의 '외도' 에서 시작됐으며 그 후에도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는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불행한 사태가 다시는 재연되지 않을 여건을 만드는 것은 기업인.정치인.관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개발연대의 주역인 鄭전명예회장의 별세는 굴뚝산업으로 대표되는 압축성장 시대의 마감을 의미한다.

이를 계기로 재계는 '황제경영' '세습경영' 으로 표현되는 구시대적 경영관행과 지배구조를 청산하고 투명하고 선진화한 경영관행을 정착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현대그룹은 고인이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업적이 더 이상 뿌리째 흔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속히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생긴 형제간 앙금을 씻고 함께 구조조정에 매진하는 한편 정보화 시대로의 전환을 서둘러 더 이상 현대가 한국 경제 회복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인은 생전에 "기업가는 자신이 일으킨 사업이 자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이제 고인은 갔지만 현대가 오래도록 한국 경제의 주역이자 존경받는 기업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남은 현대인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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