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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1인 창무극’ 공옥진 여사 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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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공옥진

세트도, 조명도, 분장도 필요 없었다. 그저 널찍한 공터에 목 축일 막걸리 한 대접이면 너끈했다. 달랑 몸뚱아리 하나로 무대에 섰건만, 구수한 소리 한자락에 마음이 녹았고, 질펀한 농에 배꼽을 잡았으며, 요망한 춤동작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실컷 웃다 보면 괜스레 눈물이 나는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인 창무극(唱舞劇)’의 대가이자 ‘병신춤’ ‘곱사춤’의 명인 공옥진씨가 9일 오전 전남 영광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79세. 공씨는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 중이었다.

 # 굴곡진 삶=고인은 전남 승주군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7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일본군에 끌려가게 되자 홀로 남게 된 고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서 ‘식모’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경찰관이었던 남편은 6·25 전쟁 때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혼 뒤엔 속세와 인연을 끊고자 구례 천은사로 입산해, 수진 스님으로 2년 3개월간 생활했다.

 말년도 불우했다. 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겨우 몸을 추스려 2004년 공연에 나섰지만 공연하고 나오다 또 쓰러졌다. 교통사고까지 겹쳤다. 2007년엔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매달 43만원의 정부 보조 생활비로 살아야 했다. 90년대 후반부터 ‘1인 창무극’의 맥이 끊길 것을 안타까워한 동료·후학들이 무형문화재 지정에 나섰지만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닌,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 문화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부됐다. 고인의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는 2010년 11월에야 전남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 원조 멀티 플레이어=전남 영광 지역 장터에서 흥타령과 살풀이춤, 토막 창극을 하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건 70년대 중반이었다. 초야에 묻혀 있던 그를 무용평론가 고 정병호(1927∼2011)씨가 발굴해 서울 중앙 무대에 소개했다.

 78년 4월 서울 안국동 ‘공간사랑’ 개관 공연 ‘심청가’는 예인 공옥진의 진가를 세상에 알려준 무대였다. 2시간 남짓 동안 고인은 혼자 심봉사와 뺑덕 어미, 심청 등을 넘나들며 소리·춤·재담·연기의 올라운드 플레이로 객석을 휘어잡았다. 특히 맹인 잔치에서 다양한 맹인들의 모습을 풍자한 대목은 코믹 춤의 백미였다. ‘병신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병신춤’은 장애우 폄하 논란에 휩싸이며 고인에게 부메랑이 되기도 했다.

 고인은 탁월한 스토리텔러였다. ‘심청전’ ‘흥보전’ ‘장화홍련전’ 등 고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색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으니 대충 버무려야지”라고 겸손해 했지만, 그는 춤과 노래, 연기와 입담과 구성력을 모두 갖춘 원조 멀티 플레이어였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대한민국 모노뮤지컬 ‘1인 창무극’은 공옥진만이 해낼 수 있는 장르였다. 고인의 타계 소식에 JYP 박진영씨가 “공옥진 여사는 내가 본 최고의 엔터테이너”라며 애도를 표한 이유다.

 유족으로는 딸 김은희(63)씨와 손녀 김형진(40)씨가 있다. 걸그룹 2NE1 멤버 공민지의 고모 할머니이기도 하다. 전남 영광군은 고인의 장례를 영광문화원이 주관하는 문화인장으로 치른다고 밝혔다.

빈소는 영광 농협장례식장. 영결식 12일 오전 9시, 발인 및 노제 오전 10시. 061-353-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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