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 이전 멋진여자 되고파" 김혜수

중앙일보

입력

#1 프롤로그

기자의 고교 동창 중에 김혜수를 유난히 좋아했던 녀석이 있었다. 눈망울이 맑고 감수성 짙은 모범생이였다. 그가 2학년때(1986년) 참고서 책갈피에 김혜수의 사진을 꽂아 놓은 걸 보곤 나는 "자식, 별 짓 다하네" 라며 뺏어 달아나곤 했다. 그때마다 애인사진이라도 놓친 양 허겁지겁 달려왔던 그였다. 지금도 김혜수를 보면 녀석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2 영화속에서

하얀 목련이 수줍게 고개를 내 민 공원에서 김혜수(31)를 만났다. 오랜만에 봄 햇살이 좋은 날이라 실내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영화 오랜만이죠? 경주에서 촬영을 한다던데." "아 내일 또 경주 내려가요. 5월말 개봉 예정인데 반쯤 찍었죠. "

'주유소 습격사건'의 김상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액션 코미디 '신라의 달밤'은 김혜수가 '닥터K' 이후 3년 만에 선택한 작품이다.

'깜보'(86년)로 데뷔한 후 열네번째 영화다. 두 달전 MBC 드라마 '황금시대'를 끝낸 뒤로 영화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맡은 역은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지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미묘한 긴장을 유지해가는 발랄한 라면집 주인이다.

"사람들은 제가 영화를 이렇게 많이 찍은 줄 몰라요." 그도 그럴 것이 '첫사랑'(93년)과 '닥터 봉'(95년)을 제외하면 흥행이나 비평면에서 돋보인 작품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은 적잖이 부담이 될 듯도 했다. '국희'나 '황금시대'같은 드라마의 뜨거운 반응이나 토크 쇼의 성공에 비하면 영화는 김혜수에겐 아직 '처녀지'라 할 수 있다.

"사실 작품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연기로 승부를 걸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미지로 갈 것인지. 그러다 '신라의 달밤'을 선택했죠. 코미디 장르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 작품은 시나리오가 딱이다 싶었어요."

전도연·고소영·이미연 같은 라이벌이 영화에만 전념하는데 김혜수는 그렇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스크린이 폼 나는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대중과 좀 더 가까이서 만나는 방송도 매력적이잖아요. 이제 한쪽에 무게를 둬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해요. 어딘지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이라며 여운을 남긴다.

#3 촬영장에서, 식당에서

서울 강남의 한 잡지사의 화보 촬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찾는 게 CD였다. 자신이 냅스터에서 직접 전송받은 곡들을 모은 그 CD를 오디오에 넣더니 볼륨을 크게 올렸다.

마릴린 맨슨의 음악들인데 비트가 강했다. 스태프들이 10여명 있었지만 김혜수의 독무대였다. 카메라 앞에서나 잠시 쉴 때나 끊임없이 리듬에 몸을 맞춘다.

"일하는 게 재밌잖아요." 옷을 여섯 번이나 바꿔 입으며 두 시간 넘게 촬영을 계속하는데도 뭐가 저리 좋을까 싶을 정도로 신이 난다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일을 하니 배가 안 고플리 있나. 식당을 찾았다.

"전라도식 한식집? 프랑스 요리집? 아니면 스파케티 집? 다 아니깐 종목만 선택해요" 하더니 일행의 의중을 읽은 듯 스파게티 집으로 가자고 한다. 점심을 샌드위치 몇 쪽으로 때웠다는 그녀는 리조토와 스파게티 한 그릇씩 주문했다. 정말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두 그릇이 싹 비워졌다.

잘 먹는다는 말을 방송에서 여러 차례 들었지만 정말 놀랬다. 그런데도 살은 많이 빠졌다. 영화 때문인지 최근 5kg나 줄었다고. 다이어트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먹는데 무슨 다이어트냐'는 표정이다.

#4 독립적이란

김혜수처럼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연예인도 드문 것 같다. 대답 한마디 한마디가 당차고 옹골차 괜한 대꾸를 하기가 어려웠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사람이 좋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구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정해주는대로 작품에 출연하곤 했는데 점차 혼자 힘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

그녀는 사람이 독립적이지 않으면 지치기 쉽고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다며 줄곧 '독립'을 강조했다. 실제 자신이 그렇지 못해 그렇게 돼야한다는 신념이기도 하다면서…. 그리고 훌륭한 배우는 자신의 순도를 어떻게 지켜가느냐가 관건이라는 말도 했다.

#5 에필로그

'깜보'로 데뷔 시점을 잡아도 족히 15년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벼온 김혜수는 대중에게 친구처럼 친숙한 연기자다. 그녀에게 이번 영화는 아마 그녀의 길을 선택하는데 큰 시금석이 될 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고 귀사하던 길 내내 귓가에 맴도는 한마디가 있었다. "좋은 연기자 이전에 멋진 여자로 살고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