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청년들, 웬만한 직장 아니면 관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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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스페인 경제가 2008년 이후 또다시 침체에 빠져들고 있다. 3일(현지시간) 마드리드에서 한 남성이 수집한 고철을 쇼핑카트로 옮기고 있다. [마드리드 AP=연합뉴스]
심재우
자동차팀장

스페인 영화 ‘아마도르(Amador, 2010년)’를 봤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의 모순된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지인의 설명에 귀가 솔깃해서다.

남미에서 스페인으로 이주한 여인이 아마도르라는 노인의 간병을 맡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아마도르가 혼자 사는 집에 가끔 들르는 딸로부터 다달이 500유로(약 70만원)를 받기로 하고 간병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아마도르는 숨을 거둔다. 500유로가 꼭 필요했던 남미 여인은 아마도르의 죽음을 딸에게 알리지 않고 한 달이 다 되기를 기다린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이웃의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안 환기를 시키며 버텼다. 그러나 딸 부부가 불시에 방문하면서 아마도르의 죽음이 드러났지만 딸은 “바닷가에 집을 다 지을 때까지 우리도 아빠의 연금이 계속 필요하다. 잘했다. 두세 달만 더 버텨 달라”며 남미 여인을 계속 고용한다.

 지난주 스페인을 방문했다. 마드리드 시내에서 연금으로 먹고사는 노인층은 실제 경제위기를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스페인 4대 은행인 방키아의 부실로 190억 유로 상당의 공적자금 투입이 결정되는 등 국가 신용등급은 계속 하향 추세지만 이들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자신이 받던 연봉의 대부분을 수령하는 연금이 이들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부는 연금 혜택 대상을 줄이기 위해 정년을 65세에서 67세로 늘렸지만 기업들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어차피 60세가 넘으면 거의 일을 하지 않는 열외 인력으로 분류되는 만큼 생산성 향상과 무관한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기간만 2년 더 늘었다는 푸념이 뒤따랐다.

 스페인의 올 1분기 실업률은 24.4%다. 지난 2일 유럽 통계청이 발표한 스페인의 청년실업률은 52.1%에 달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의 평균(14.1%)을 훨씬 웃돈다. 노인들이 주로 소비를 하다 보니 헬스케어 업종은 성행하고 있지만 젊은층이 지갑을 닫아 자동차 등록대수는 5년 전 170만 대에서 지난해 70만 대로 대폭 줄었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지도 않았다. KOTRA 마드리드 무역관의 김건영 관장은 “웬만큼 좋은 직장이 아니면 때려치우고 2년간 실업수당을 받는 쪽을 선택하는 젊은이가 많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는 캥거루족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대거 벤처 창업에 뛰어든 모습과는 대조된다. 실제 마드리드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메코 공단은 입주 기업들이 문을 닫으면서 한산한 모습이었다.

 스페인 경제위기를 불러온 요인으로 부동산 버블 붕괴와 이에 따른 금융권 부실을 꼽는 의견이 많지만 무엇보다 기업가 정신을 짓누르는 지나친 복지가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비즈니스 스쿨 가운데 세계 5위권에 꼽히는 마드리드 IE비즈니스 스쿨에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는 파블로 마르틴데 홀란 교수는 “사람들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해 지나친 복지는 혁신과 안정 가운데 안정을 택하게 하면서 기업가 정신을 퇴색시킨다”며 “기존에 누려왔던 이점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여야 가치를 창출하는 파괴적 혁신이 완성될 텐데 스페인의 경우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유로2012에서 우승한 자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젊은이들의 광적인 열기가 경제부흥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보지만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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