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다이닝 ‘집밥’ 33번째 모임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3일 가회갤러리에서 열린 ‘집밥’ 모임 현장. 하정(맨 왼쪽)씨는 이날 ‘집 파스타’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대접했고, 손님들은 이를 함께 먹으며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달 23일, 노릇노릇한 기름 냄새에 홀려 가회동 가회갤러리에 발을 들였다. 유리창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앞치마를 두른 한 여성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이날 모임의 호스트이자 일일셰프인 하정(35)씨다. 그는 등 뒤에 걸린 작품엔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듯 현장을 진두지휘 하기에 분주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환한 미소로 맞이하는 하정씨의 첫 마디. “더운데 찾아오시느라 고생했어요. 초대장은 꼭 챙겨 오셨죠?”. 내가 왜 ‘집밥’을 먹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를 묻고, 그에 절실히 답을 한 사람만이 초대된 자리다. 소셜다이닝 ‘집밥’의 33번째 행사, ‘우리같이 집 파스타 먹고 여행 이야기’에 슬쩍 숟가락을 얹어보았다.

홈페이지·페이스북 통해 그리웠던 집밥 나눠

 ‘소셜다이닝’이란 우리에게 아직까지 조금 생소한 단어다. 이는 간단히 말해 ‘식사’를 매개로 모르는 사람과 친교를 맺는 행위를 의미한다. 일일셰프가 된 누군가가 요리를 할 때도 있지만, 각자 음식을 해오거나 집밥 같은 음식을 사먹기도 한다. 처음 본 사람들과도 열린 마음으로 가족처럼 밥상을 나누자는 것이 취지다. 미국과 유럽에서 막 성행하고 있는 이 모임을 한국에 끌어들인 사람은 ‘집밥(www.zipbob.net)’의 대표 박인(27)씨다.

 인도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던 그가 한국에 홀로 돌아와 여의도의 모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을 때, 그의 우울감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려 밥을 먹으면서 팍팍한 주제를 나누는 것도 그랬고, 어쩌다 상사와 함께 식사라도 하는 날엔 분위기에 억눌려 체하기 일쑤였단다. 저녁에 일찍 집에 들어가도 그를 반겨주는 건 어두컴컴한 식탁뿐이었다. 박씨는 그러다 문득 ‘집밥’이 먹고 싶어졌다고 한다. 배달 음식 대신 사기 그릇에 담뿍 담긴 따뜻한 집밥과, 가족처럼 나누는 수다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 길로 그는 사이트와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고, 자신처럼 집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옆집 할머니의 카레라이스, 요리 블로거의 토란탕 등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모임은 주로 단발성이고, 한번 참여했던 사람이 다른 주제의 행사에 다시 참여하는 경우도 25%정도 된단다.

 이날 마련된 33회째 밥상은 다른 모임에 비해 유독 경쟁률이 치열했다. 한동안 일일셰프가 요리를 해주는 경우가 뜸했던 것이다. 일일셰프로 나선 사람이 요리하고 뒤치다꺼리 하기에 너무 바빠 초대한 손님과 대화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집 요리를 맛보는 만남 대신, 각자가 싸온 음식 소량을 함께 먹으며 공통의 대화 주제를 나누는 것에 만족해야 했던 모임이 더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던 중 호스트 하정씨가 직접 일일셰프로 나서서 초대된 사람들에게 파스타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간택된 사람들만이 이 날 모임에 함께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부터 40대 주부까지 스펙 접고 대화

 여행으로 유럽을 오래 접한 하정씨에게 집밥은 곧 집파스타의 동의어 같다고 한다. 그가 이날 만들어준 파스타는 ‘야채 파스타’ ‘고기 파스타’ ‘해산물 파스타’ 총 3가지로 그 이름도 간단하다. 컨셉트 역시 ‘안 간단하면 반칙, 맛 없으면 무효’다. 토마토와 크림 소스도 없다. “라면 끓여 먹듯이 파스타도 간단히 삶아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게 그가 모임에 앞서 짚고 넘어간 포부다. 모임은 하정씨가 파스타를 만드는 것을 다 같이 구경한 다음 식사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여행’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이 과정을 야채·고기·해산물 파스타 순서대로 3회 반복하면서 약 3시간가량 이어졌다.

 이날 모임의 구성원이었던 남다영씨는 하정씨가 쓴 ?이런 여행 뭐 어때서?에 반해 당첨 소식을 듣고는 구미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다. 다른 사람들 모두 ‘집밥’과 ‘여행’에 있어서는 나름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첫 대면의 어색함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독특한 건 이들이 “배달음식에 신물이 난다” “여행에서 나를 찾아온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등의 말은 나누면서도, 서로의 배경에 대해선 전혀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함을 나누고, 사는 지역·스펙 등을 밝히는 일 따위는 중요치 않게 된 것이다. 때문에 고등학생부터 40대 주부까지 스스럼 없이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 ‘집밥’이 사랑받는 또 다른 이유다.

 갤러리 마감시간에 밀려 모임을 파하는, 아쉬움이 역력한 표정의 구성원들에게 하정씨는 고맙다는 말 대신 “오늘 여기, 이 시간의 한 조각이 되신걸 축하 드립니다”라고 했다. 초면이지만 경계 없이 덕담을 나눌 수 있는 시간, 집밥을 앞에 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다혜 기자 blushe@joongang.co.kr 사진="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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