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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조업, 5년 내 1등 빼고 다 망할 수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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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미늄 생산 전문업체인 동양강철의 박도봉(53) 회장이 보는 ‘한국 제조업의 또 다른 위기’도 바로 그렇다. 박 회장은 ‘5대 취약 산업’이라 불리는 열처리, 주물, 주조, 단조, 도금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29세에 열처리업체를 창업한 뒤 현재는 동양강철을 인수해 굴지의 중견기업으로 키운 인물이다.

그는 “자원강국들이 잇따라 ‘원자재 수출세’를 부과해 또 다른 제조업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재를 수입해 상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한국의 산업 구조상 머지않아 제조업체의 위기는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오랜 현장 경험에 의한 직감이라고 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가 5월부터 구리·석탄에 대해 25%의 수출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호주와 중국은 자원세라는 이름으로 원자재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호주는 이달부터 석탄·철광석을 개발할 경우 자원세를 매긴다. 중국도 주석·마그네사이트에 자원세를 최고 20배나 올렸다. 칠레·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지역의 자원강국들도 이런 규제를 할 움직임이다.

박 회장은 “각국별로 원자재 수출세를 보통 20% 이상으로 정하는 추세”라며 “국내 제조업체들이 앞으로 그만큼 더 주고 원자재를 수입해 온다면 비용부담으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제조업은 5년 내 1등 업체를 빼고 다 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 회장은 “목재·합판 산업의 전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합판·목재산업 경쟁력은 한때 세계 최고였다. 그러나 각국이 원목에 수출세를 부과하면서 합판·목재산업은 고사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이 고액의 수출세를 물렸기 때문이다. 미국과 캐나다도 마찬가지다. 원자재 수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자원 강국들은 한때 원자재를 수출하면 장려금까지 주면서 수출을 권장했으나 지금은 정반대다. 향후 한국 제조업의 위기를 이런 시각에서 다시 봐야 한다.”

따라서 제조업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해법이다. 그는 “일본도 이런 현실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해외 자원개발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관련 업체들은 현지로 속속 진출했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뒤 공장에 다니며 꿈 키워
박 회장이 5년 전부터 베트남 진출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처음에는 ‘개성공단’에 공장을 지을까 검토했다. 개성공단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언어가 통하는 노동자들이 있으며 인건비가 중국이나 베트남만큼 싸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김정일이라는 불투명성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사업하는 사람이 그런 불투명성을 알고도 운에 맡긴 채 부나비처럼 뛰어들 수는 없다. 결국 나는 알루미늄 원료인 보크사이트가 풍부한 베트남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기업들이 베트남 최대 경제도시인 호찌민시로 진출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베트남의 수도가 하노이인데 정부가 앞으로 이곳을 발전시키지 않을 턱이 없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그곳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인근에는 알루미늄 원료인 보크사이트도 풍부했다. 그의 예상은 또 한번 적중했다. 허허벌판이었던 하노이가 현재는 국제도시로 급성장 중이다.

그는 제조업체들이 해외로 나갔을 때 국내 제조업의 공동화와 일자리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해법도 언급했다.

“제조업체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일본의 퇴보’와 ‘독일의 진화’가 있었다. 일본의 소니 등은 비싸도 팔린다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반면 독일의 제조업체들은 해외진출과 더불어 연구개발·마케팅 강화, 조립산업 육성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 우리도 독일과 같은 정책을 통해 해외진출의 공백을 메우면 된다.”

박 회장은 자신의 ‘현장 직감’이 거의 틀리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는 충남 금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전상고와 목원대를 나왔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돈을 벌어 상장회사 오너 한번 해 보겠다”는 남다른 의지가 있었다. 그런데 자본 한 푼 없이 돈을 버는 방법은 기술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열처리, 주물, 단조, 도금, 주조업종에 관심을 뒀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 영등포에 있는 열처리 업체에 찾아갔다. 생산직으로 12시간씩 교대해 가며 1년 넘게 일을 했다. 내 사업을 위한 현장 실습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이후 1년은 영업사원을 자청했다. 열처리가 당장은 열악한 분야이지만 언젠가는 유망산업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열처리란 철강에 열을 가해 단단한 성질로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당시만 해도 버너에 철강을 굽는 열악한 수준의 산업이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현장 경험을 통해 열처리 기술을 개발하고 29세 되던 1988년 600만원으로 창업했다. 직원은 1명. 바로 자기 부인이었다. 그는 전기로를 이용한 열처리업체로 성장을 거듭했다. 14년 만에 100명의 직원을 둔 매출 100억원대 회사로 성장했다. 열처리 전문업체인 KPT로 코스닥 상장까지 했다. 당시 이 회사는 동양강철의 하청업체였다.

그런데 동양강철은 외환위기 때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같은 알루미늄 전문업체인 남선알미늄도 사정이 비슷했다. 해외에서 원료를 수입하는 업체이다 보니 외환위기에 따른 환율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잇따라 쓰러졌다. 알루미늄 업체를 인수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수합병(M&A) 전문가들은 알루미늄이 사양산업이라며 이들 업체에 사형선고를 한 것이다. 동양강철 경매도 수차례나 유찰돼 파산선고를 앞뒀다.

그러나 박 회장은 알루미늄이 사양산업이 아니라 미래의 성장산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어음 끊으면 대표이사직 내놓겠다’ 선언
M&A 전문가들은 당시 알루미늄 업체들을 아파트 새시나 만드는 건축자재 업종으로만 판단했다. 전문가들의 함정이었다. 반면 박 회장은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이 남달랐다. 알루미늄이 건축용보다는 향후 산업용으로 더 많이 쓰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친환경’ ‘경량화’가 키워드였다. 앞으로는 자동차·선박·전자기기 분야에서 철강 대신 친환경·경량화 소재를 찾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박 회장은 낙찰자가 없어 법원이 파산시키려 했던 동양강철을 값싸게 인수했다. 외형만으로 보면 매출 100억원대 회사가 10배가 넘는 거대기업을 인수했다.

인수자금을 대준 금융전문가들은 원래 동양강철보다 남선알미늄을 인수할 것을 요구했다. 주식시장에서 남선알미늄은 관리종목, 동양강철은 상장폐지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남선알미늄은 2~3년간 구조조정만 잘하면 주가를 다시 띄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먹튀를 하겠다는 금융마인드가 아니라 직원들과 인생을 건다는 제조업 마인드로 알루미늄 산업의 미래만 보고 동양강철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양강철을 인수한 뒤 전 직원을 불러 놓고 세 가지를 공약했다.

“첫째는 이 회사가 어음을 끊다가 부도를 낸 아픔이 있으니 또다시 그런 상황으로 몰리면 나는 즉시 대표이사직을 내놓겠다. 둘째는 구매·재무·인사 등 모든 것을 투명하게 노동조합 측에 공개하겠다. 셋째는 사측도 외부청탁을 받지 않을 테니 노측도 어떤 사소한 청탁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매년 10% 안팎의 성장을 거듭해 현재는 매출 3000억원대의 회사로 컸다.

동양강철은 2007년에 재상장을 했다. 상장 폐지됐다가 재상장된 국내 1호 기업이라는 명예도 얻었다. 이런 성과의 밑바탕에는 투명경영이 있다는 게 박 회장의 생각이다. 그가 투명경영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박 회장은 90년대 초 영국의 열처리업체인 바디코트를 벤치마킹했다. 바디코트는 중소형 알루미늄 관련 업체만 150여 개를 인수합병했다. 그도 한때 바디코트에 자신의 지분을 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판 협상이 결렬됐다. 그 이유는 한국의 중소기업 재무제표를 어떻게 믿겠느냐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노조 측에 재무제표까지 다 공개하고 투명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김시래 기자 sl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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