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홀] 한국영화 겨울잠에 빠졌나

중앙일보

입력

오는 17일 개봉하는 ‘그녀에게 잠(潛) 들다’(박성일 감독) 는 요즘 우리 영화계 안팎에서 일고 있는 우려를 확인하게 한다.

최근 2년새 시장점유율 40% 정도를 기록하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노래하는 시기에 우리가 자칫 잊기 쉬운 작품의 완성도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그녀에게…’는 지난해 ‘거짓말’(장선우 감독) 로 화제를 모았던 신인배우 김태연이 주연한 영화.

무명 작곡가인 남자 친구에게 인생을 걸고 그의 예술적 성공을 위해 혼신을 다하다가 결국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한 불행한 여자 수빈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제작진은 베아트리체 달이 호연한 프랑스 영화 ‘베티블루 37.2’(장 자크 베넥스 감독) 를 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다.‘베티블루’의 소설가 대신 작곡가인 재모(이주현) 를 남자 주인공으로 내세웠다.하지만 결과는 기대 밖이다.

‘베티블루’의 순수와 열정을 재현하려고 노력한 흔적(김태연은 영화 속의 인물들이 살았던 배에 불을 지르는 장면에서 심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은 역력하나 ‘그녀에게…’는 시도 자체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수빈이 재모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다.배우들의 행동에 공감이 가야 영화의 힘이 살아난다고 볼 때 ‘그녀에게…’는 막이 내릴 때까지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예술을 포기하고 제주도 과수원의 농부생활에 만족해하는 재모에게 실망이 쌓여 자해마저 불사하는 수빈의 돌출행동에 연민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왜 그녀가 거의 엽기에 가까운 행동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영화의 흐름이 건너뛰고,그마저 대부분 상투적 표현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상황에 맞지 않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욕설,영화에 나온 이유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조연들,군데군데 끼어맞춘 듯한 정사신 등이 뒤섞이며 작품의 성격 자체를 의심스럽게 한다.혹시라도 김태연의 상품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은 아닌지….

문제는 이같은 미숙함이 ‘그녀에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지난 겨울을 달궜던 멜로영화 이후 선보인 ‘광시곡’‘천사몽’‘클럽 버터플라이’ 등에서도 지적됐던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휩쓸고 간 공백이 커보이는 요즘 우리 영화계의 분발이 요구된다.

그렇잖아도 영화계 일각에선 ‘영화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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