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할리우드 왕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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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에린 브로코비치' 가 개봉됐을 때 미국 연예전문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평단의 귀염둥이였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마침내 주류 히트작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소더버그가 그 여세를 몰아 '트래픽' 으로 할리우드의 정상에 우뚝 섰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릴 25일(미국 현지시간) 은 소더버그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에린…' '트래픽' 모두 작품상.감독상 후보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올해로 73회를 맞는 아카데미에서 한 감독의 작품 두 편이 작품상과 감독상에 오르기는 처음이다.

물론 현재로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 얘기를 활달한 앵글에 잡은 '글래디에이터' (리들리 스콧 감독) 와 물 흐르듯 유려한 동양 검법으로 미국을 강타한 '와호장룡' (리안) 이 각각 12, 10개 부문에 오르며 자웅을 겨루고 있는 까닭이다.

흥행성적도 좋다. 줄리아 로버츠라는 초특급 스타를 2천만달러의 개런티로 영입했던 '에린…' 은 2억5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현재 상영 중인 '트래픽' 또한 1억달러에 다가서고 있다.

특히 '트래픽' 은 미국 감독협회.전미 비평가협회.뉴욕 비평가협회 등 수많은 영화상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는 저력을 발휘했다. 상업적 흥행과 예술적 호평이란 두 마리 토끼를 거머진 것이다.

1989년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에 1백만달러짜리 저예산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로 선댄스.칸영화제 대상을 차지하며 시끌벅적하게 데뷔했던 소더버그가 '제2의 절정기' 에 들어선 모양새다.

사실 그는 지난해 펴낸 저서 『사라져라』(Getting away with it) 에서 "데뷔작의 영광에 취해 이후 수년 동안 방황했다" 고 고백했다. '섹스…' 이후 선보인 '카프카' (91년) '리틀 킹' (93년) '언더니쓰' (95년) '스키조폴리스' (96년) 등에서 현대사회의 여러 모순에 천착했지만 '섹스…' 의 후광에 밀려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지만 소더버그는 '에린…' 과 '트래픽' 으로 지난 세월의 부진을 씻어냈다. 다소 난해한 내용으로 일반인에 가까이 가지 못했던 예전과 달리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확보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98년 처음으로 미국 대형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은행털이범과 여형사의 사랑을 그린 '조지 클루니의 표적' 이후 닦은 대중적 감각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더버그는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란 사회의 심각한 이슈를 관객이 지루하지 않도록 즐겁게 풀어내는 일이다. 메시지와 오락성의 균형이 중요하다. 그러면 관객도 영화의 정치적 내용과 그들 인생의 연관성을 깨달을 것이다" 고 말했다.

소더버그의 강점은 현대사회에 대한 관심과 정교한 연출력. 소외된 성( '섹스…' ) , 권력과 광기( '카프카' ) , 경제공황( '리틀 킹' ) , 환경오염( '에린…' ) , 마약분쟁( '트래픽' ) 등 관심의 폭이 넓다. 개인과 사회가 서로 부딪히며 발생하는 갈등을 촘촘한 그물망으로 낚아채는 솜씨도 뛰어나다. 또 험난한 현실에서도 앞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국식 낙관주의를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그는 현재 찍고 있는 '오션 11' 에서 변신을 시도한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를 터는 강도들의 소동을 그린 코미디로,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의 60년작을 다시 만들고 있다. 그는 지난달 베를린 영화제의 '트래픽' 기자회견장에서 "신작에선 종전의 사회적 색채를 모두 걷어버리겠다" 고 말했다.

소더버그는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올 오스카상에서 그 자신이 어떤 작품을 밀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 아카데미의 전초전격인 골든글로브상에서 '에린…' '트래픽' 모두 작품.감독상 대열에 합류했으나 작품상은 '글래디에이터' 에게, 감독상은 리안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트랙픽' 은…>

10일 국내 개봉하는 '트래픽' 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마약문제를 꿰뚫고 있다. 멕시코와 미국 오하이오주와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등을 돌며 마약의 국제유통, 약물에 중독된 청소년, 마약 범죄집단 등을 고루 조명한다.

때문에 '트래픽' 을 보는 관객에겐 긴장이 요구된다. 미 대통령 직속 마약단속국장에 임명돼 마약소탕에 나서는 로버트(마이클 더글러스) 와 헤로인에 중독된 그의 딸, 마약조직과 뒷거래하며 이득을 챙기는 멕시코 권부 밑에서 갈등하는 멕시코 경찰(베네치오 델 토로) , 남편이 마약거래 혐의로 구속되자 남편 대신 암흑세계에 뛰어드는 주부(캐서린 제타 존스) 등 서로 다른 에피소드가 긴박하게 맞물리기 때문이다.

장면 전환이 워낙 신속해 잠시라도 정신을 팔면 작품을 온전히 따라가기가 어려울 정도다.

어려서부터 독립영화를 찍어온 소더버그는 이 영화에서 촬영도 직접 했다.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찍는 핸드헬드 기법으로 찍어 화면이 흔들리지만 마약이란 검은 세계의 속내를 보여주는 데 어울린다. 부패가 심한 멕시코 국경지대를 희뿌연 황갈색으로, 청소년들이 마약에 함몰된 미국 오하이오주 일대는 차가운 청색으로 처리하는 등 장면별로 화면의 색상을 달리한 점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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