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 잠들면 광기가 출몰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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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지독하고 위험한 질병이 급습했다. 26년 전의 기억이 악령처럼 떠올랐다. 그때 혼수상태는 계속 되었었고 두 달을 절망적인 상태로 투병한 바 있다. 회복되었을 때 청각을 잃었다. 청각을 잃자 사람과의 교제를 피하고 내면에 침잠했다. 이후 그는 건강에 따라 견딜 수 없는 울화에 고통받거나 아니면 평온을 되찾는 심리적 병리상태를 반복했다.

또 다시 과거의 병마가 악마처럼 음흉한 이빨을 드러내고 방문했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 그는 두려웠다. 더구나 73세라는 나이가 그를 불안의 심연으로 초대했다. 이렇게 죽음은 방문하는구나, 생각했다. 허탈했다. 가뜩이나 현실은 운신의 폭을 점점 제약하고 억압하지 않던가. 그는 두려움과 공포, 자포자기적 상황에 직면했다. 주치의 아리에타가 고야를 정성껏 보살피고 간호했으나 그는 비통했다.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수석 궁정화가로서의 영광, 이에 반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모순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역경을 잘 극복했다. 수석 궁정화가라는 칭호에 걸맞게 화가로서의 자질과 명예만큼은 아직 자신의 것이었다. 더구나 마드리드 외곽에 훌륭한 전원주택을 장만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가 구매한 집은 공교롭게도 '귀머거리의 집'이라는 칭호로 이미 회자되고 있었으니, 이 우연이 앞으로 그의 장래를 예견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그는 지독한 병마와 치열하게 싸워 마침내 이겨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육체는 회복됐으나 정신이 보다 황폐해지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억압정치가 시작됐다. 자유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고 개혁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검거됐다. 고야의 벗들도 대부분 망명길에 올랐다. 고야 역시 왕정의 신임을 잃은 상황이었다. 그는 별장에서 은둔했다.

어둡고 혼탁한 현실, 그는 추악한 인간상을 그림으로 고발하기로 작정했다. 별장의 일층 식당과 이층 응접실의 회벽은 훌륭한 캔버스였다. 그렇다, 벽화가 되살아난 것이다. 재생하는 벽화. 그는 회벽의 분위기를 위악적으로 몰고 가서 칠통의 마음을 반영했다. 세월의 풍화에도 부식되지 않고 벽화가 영원히 남아 인간의 악행과 죄악을 고발하기를 염원했다. 분노는 1923년까지 계속 됐다. 이른바 '검은 그림' 연작.

'검은 그림'은 잔인한 폭력에서 야기되는 두려움을 악몽처럼 그렸다. 그림은 온통 우울하고 비통하다. [개]. 불안하게 위를 응시하는 눈에서 존재의 불안이 감지된다. 알 수 없는 공포에 지질렸다. 개를 위협하는 힘은 정체가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개는 지금 잔뜩 공포에 질려서 전진을 포기했거나, 아니면 모래나 늪 속 깊이 매장당하기 직전이다. 그렇다 생매장이다.

거대하게 짓누르는 황토색 배경, 왜소한 개. 이것이 비유하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화면을 뒤덮는 배경은 화면마저 찢을 기세다. 모든 대상을 위압하고, 잔인하게 덮쳐서 삼킬 기세다. 흉폭하고 잔인한 폭력 앞에 순결한 한 영혼이 유린당하기 직전이다. 고야는 사회 전역에 만연해 있는 폭력구조를, 실체없는 거대한 악령으로 비유했다. 그것의 위협 앞에 꼼짝 못하고 두려워 하는 개인을 연출했다. 우측 상단부로부터 거침없이 하강하는 힘의 위세가 당장 개를 집어 삼킬 것이다.

개는 바로 고야 자신, 확대하면 폭력적 구조에 노출된 모든 개인을 상징한다. 전제군주시대, 인간의 자유와 계몽을 우회적으로 지지하고, 반이성적인 폭력적 사회구조를 풍자했던 고야였다. 그러나 이제 바야흐로 매장 직전이다.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살과 처형에서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는 불안감이 팽팽한 긴장으로 형상화됐다. 반동적인 폭력에 희생될 것이라는 자기예측이 맑고 두려운 눈망울에 눈물로 고여 있다.

또 한 점의 '검은 그림', [사투르누스]. '사투르누스'는 '크로노스'로 잘 알려진 시간의 신이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 그는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거세하여 바다에 던졌지. 그리고 누이인 레아를 아내로 맞았다. 그러나 그는 부친을 살해했다는 죄의식과, 자신 역시 스스로 낳은 자식들에게 살해 당할까 늘 두려웠다. 그는 자식을 낳는 족족 삼켰다.

크로노스가 모래시계와 낫을 어트리뷰트로 삼고 자식을 삼키는 것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을 주관한다는 것의 비유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스로 자행한 부친살해와 그것의 심리적 공포로 늘 불안하고 노심초사하는 부친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 불안은 아들 제우스에 의해 현실로 드러났다.

아내 레아는 제우스를 잉태할 때 지혜를 발휘하여 제우스를 가까스로 도피시켰다. 모든 영웅이 그렇듯이 그는 기아되고 훗날 난관을 극복하여 참다운 영웅이 되는 법 아니던가. 제우스는 성장하여 토사제를 구해 크로노스에게 먹이고 잡아 먹힌 형제들을 토하게 했다.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지하 세계에 감금시켰다고 하지. 부친살해.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 관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는다.

그러나 고야의 크로노스는 부친살해의 무의식도 아니고 시간의 시작과 끝에 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분노, 공포와 두려움 등의 어두운 내면이 있을 뿐이다. 크로노스는 아들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우적우적 뜯어 먹는다. 이미 머리와 오른팔이 뜯겨 잘려 나갔다. 마악 왼팔을 뜯어 먹으려는 중이다. 이 그림으로는 제우스의 환생이나 낭만적인 세계창조에 대한 희망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본래 제우스에게 도움을 준 여신은 테미스다. 테미스에 의해 세상은 혼돈의 카오스에서 질서(코스모스)를 회복했다. 그러므로 제우스가 테미스의 도움을 입었다는 것은 비로소 질서의 세계가 안정적으로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야는 잔인하게 살육하는 크로노스를 형상화함으로써 어떤 희망도 거짓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검은 배경은 인간의 악마적 본성과 폭력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고야는 이성이 잠들면 광기가 출몰한다고 경고했다. 그의 예술적 상상력은 그로부터 시작한다. 계몽주의자다운 발상이다.


조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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