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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세계 상생 정신이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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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날 불세출의 수퍼스타에서 오늘날 스타감독으로 거듭 꽃을 피운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에게도 우울한 시절이 있었다.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을 달가워하지 않는 축구협회와 군 복무를 마쳐야 한다는 팀의 고집 때문에 하마터면 세계 무대의 꿈이 영영 무산될 뻔했다. 게다가 이때만 해도 국가이익이 우선하는 시절이었기에 개인이나 팀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태극마크에 집착하고 아시아챔피언에 만족했다면 훗날의 '차붐'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굴레를 박차고 나가 대야망을 이룬 그의 성공은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이다.

요즘 '천재'라는 찬사까지 붙은 박주영(FC 서울) 선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고 언론이 떠들썩하다. 부질없이 영웅심을 부추기거나 너무 부담을 주는 건 아닌지, 아직 어린 선수의 앞길이 걱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보다 박주영을 비롯한 FC 서울 소속 선수 3명의 청소년축구대표 팀 차출을 놓고 축구협회와 구단 측이 줄다리기를 벌이는 모습이 볼썽사납다.

전말은 이렇다. 22일 개막한 수원컵 청소년대회를 대비해 협회는 지난 17일 대표팀을 소집했다. 그러나 서울 측은 20일 프로경기를 마치고 선수들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줄다리기는 계속 됐고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들이 20일 프로경기를 마치고 뒤늦게 청소년 대표팀을 찾아갔을 때, 그 앞에는 합류 거부의 레드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필시 청소년 팀의 박성화 감독으로서는 원칙을 지키고 기강을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인 2002년 12월 대한축구협회는 프로팀의 요구에 따라 대표팀 소집 규정을 완화했다. 규정에 따르면 이번과 같은 친선 국제대회인 경우 개막 5일 전에 소집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축구연맹(FIFA)은 프로팀의 입장을 더 반영해 48시간 전에 소집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다. 즉 협회가 17일 대표팀을 소집한 것은 규정에 따른 것이고, 박성화 감독의 입장도 잘못된 게 아니다. 서울 구단의 입장은 프로팀을 위해 FIFA 규정에 따라달라는 무언의 항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은 어리고 여린 선수가 받을 상처를 협회와 구단이 고려했는지 묻고 싶다. 선수보호를 위해서라면 협회와 구단의 대승적 협력과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애국심만 요구하던 지난 시절, 조국의 부름은 거역할 수 없는 절대명령이었다. 30여 년 전, 개인의 인권을 운위하며 태릉선수촌 훈련을 거부한 결과 올림픽 메달의 영광마저 포기해야 했던 어느 여자스타의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그만큼 당시 대표팀은 개인이나 소속팀의 희생을 딛고 가는 초월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프로화 정착 단계에 이른 오늘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국위선양과 계약의무, 과연 어느 쪽이 우선해야할지 일도양단으로 처리하기도 어렵거니와 스타의 길을 걷는 선수들의 가치기준에도 큰 변화가 나타난다. 한마디로 몸값 불리기와 팬 서비스라는 프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이들에게 대의(大義)를 위해 소아(小我)를 희생하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스포츠는 규칙의 게임이다. 대표팀을 운용하는 데도 확고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스포츠행정이 일방통행으로 가면 곤란하다.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더라도 윈윈 해법이 있을 것이다. 어린 선수가 상처입지 않으면서도 대표팀의 팀워크와 사기를 높일 수 있는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먼저 구단이 승복하고, 그리고 협회가 포용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이태영 명지대 객원교수.스포츠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