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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 (23) - 하먼 킬러브루 (1)

중앙일보

입력

1940년대의 어느 날, 하먼 클레이튼 킬러브루 주니어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당신이 매일같이 마당에서 4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야구를 하니 잔디가 망가지잖아요."

남편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가 키우고 있는 건 아이들이지 잔디가 아니오."

물론 그의 집 정원에 심어진 잔디는 그저 보통의 잔디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잔디보다 더 큰 가치를 가졌던 잔디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잔디의 훼손을 감수한 댓가로 얻은 것이 역대 통산 홈런 랭킹에서 5위에 오른 위대한 슬러거였다면, 그보다 더 가치가 큰 잔디가 어디에 존재하였겠는가?

그렇다. 이 위대한 슬러거, 하먼 킬러브루는 미키 맨틀보다도, 지미 팍스나 마이크 슈미트보다도 많은 573개의 홈런을 날렸다. 메이저 리그를 거쳐 간 수많은 선수들 중, 그보다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단 4명뿐이었다.

1960년대에 최다 홈런을 기록한 타자는 윌리 메이스나 행크 에런도, 프랭크 로빈슨도 아닌 킬러브루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3루수였던 브룩스 로빈슨은 "그는 우리 팀을 상대로 무려 70홈런을 기록하였다. 나는 그가 3루를 여유 있게 돌며 내 옆을 지나가는 것을 신물이 나도록 보아야 했다."라고 회상하였다.

단순한 홈런 수 못지 않게 중요한 홈런과 타수의 비율을 살펴보면, 그의 홈런 생산 능력이 어떠한 정도였는지가 드러난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수 중 1000타수당 70개 이상의 홈런을 날린 인물은 단 3명 뿐이다. 그 3명은 베이브 루스와 랠프 카이너, 그리고 킬러브루이다. 테드 윌리엄스나 메이스, 에런 등도 이 수치에서는 킬러브루를 따라오지 못한다. 홈런의 합계와 홈런-타수 비율에서 모두 킬러브루를 앞지른 선수는 루스뿐이다.

한때 전문가들은, 루스의 714홈런 기록을 깰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에런보다 킬러브루를 꼽았다. 1960년대 초반에 그가 보여 준 홈런 페이스를 감안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1965년 이후 부상이 자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칭호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우타자로서는 최다 홈런을 기록한 인물'이 아니라 '역사상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닉네임은 킬러(Killer)였다. 이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의 성(Family Name)때문이었지만, 그 별명은 어떠한 면에서는 의미심장했다. 1960년대의 아메리칸 리그 투수들에게 그는 그야말로 '킬러'였던 것이다.

그는 결코 다재다능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수비 불안 때문에 한 포지션에 자리를 잡지 못했으며, 2할 6푼을 밑도는 통산 타율을 기록했고 대도(大盜)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단 한 가지 수단, 즉 홈런으로 만회했다. 그리고 그는 그 한 가지만으로 위대한 선수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베이스러닝 능력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응수한 바 있다."홈런을 치는 것과 많이 뛰는 것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없다."

또한 그는 루스나 팍스와는 달리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화려한 면을 가진 선수가 아니었으며, 과묵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그가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미니애폴리스는,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큰 미디어 마킷(Media Market)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업적에 걸맞는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전미 야구 기자 협회(BBWAA)가 매년 실시하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 투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BBWAA는 킬러브루를 전당으로 인도하기 전까지 3차례나 그에게 탈락의 고배를 건넸다. 그리고 루 브락이나 로드 커루, 커비 퍼킷 등이 헌액 자격을 얻자, BBWAA는 그들에게 '퍼스트 이어 일렉티(First-Year Electee)'라는 영광을 안겨 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수로서 과연 킬러브루보다 위대한 인물이었던가? 많은 전문가들은 이 질문에 고개를 젓는다.

킬러브루는 1936년 아이다호 주의 페이예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 시절 미식 축구 풀백으로 활약하였으며 프로 레슬러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고, 소년 하먼은 이 아버지에게서 강한 근력을 물려받았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도와 농장 일 등을 하며 근육을 강하게 단련시켰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야구와 미식 축구, 육상 등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오리건 주립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지역 세미 프로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그에게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이다호 주 출신 상원 의원 허먼 웨커도 그 중 하나였다.

웨커에게서 킬러브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워싱턴 세너터스의 구단주 클락 그리피스는 그에게 관심을 가졌고, 팀의 스카우트 아시 블루지를 아이다호 주로 급파하여 킬러브루를 만나게 했다. 블루지는 킬러브루가 세미 프로 경기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블루지가 관전한 4경기 동안 킬러브루는 4개의 홈런과 3개의 3루타를 포함하여 11안타를 기록한 것이다.

블루지는 그리피스에게 전보를 보내어, "그의 홈런 볼은 비거리의 한계가 없다. 그는 미키 맨틀에 견줄 만한 파워를 지녔다. 당장 그를 스카우트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세너터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금액인 3만 달러를 킬러브루에 제시하였다.

이 때에 마침 보스턴 레드 삭스의 스카우트 얼 존슨도 킬러브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그와 접촉하였고, 킬러브루는 존슨에게 레드 삭스와도 협상을 고려해 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레드 삭스의 운영진은 6천 달러 이상을 제시할 생각이 없었고, 존슨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브루클린 다저스도 킬러브루에 관심을 보였으나,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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