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계서 꺼낸 ‘국민연금 주주권’… 14개월 만에 재점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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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국민연금은 배당이나 차익을 얻는 투자자냐,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주주냐. 연금과 대기업의 관계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다. 이게 이번엔 경제민주화와 연결된 정치쟁점으로 비화하고 있다. 박근혜계 핵심인 새누리당 김재원(경북 군위-의성-청송, 재선) 의원이 22일 국민연금기금이 투자기업에 대해 주주권 행사를 의무화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다.

 국민연금이 단순히 투자만 할 게 아니라 적극적인 주주로서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이를 통해 기금의 안정적 운영을 꾀하자는 취지다. 크게 봐서는 ‘박근혜표 경제민주화 공약’의 연장선이지만 김 의원이 박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직접 상의해 발의한 건 아니다. 새누리당 쇄신파 남경필 의원과 국회 법사위원장 출신인 민주통합당 우윤근 의원 등 여야 의원 9명이 발의에 동참했다. 김 의원은 “편법으로 소수의 지분을 보유한 경영자가 사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며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함으로써 투자한 기업의 가치가 높아져 국민연금 재정의 장기적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는 이를 재벌 개혁의 수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 일감 몰아주기 등이 여론의 비판을 받을 때 정치권이 대기업 개혁 카드로 만지작거렸던 게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였다. 법안 발의자들의 인식도 재계의 예상을 뒷받침한다. 우윤근 의원은 24일 “여태까지 대기업들이 너무 멋대로 경영을 하지 않았느냐”며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했다”고 밝혔다. 남경필 의원도 “경제민주화를 위한 사전조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국민연금기금은 주식시장의 ‘큰손’이다. 운용기금 규모는 지난해 말 349조원에 달했다. 2017년에는 623조원으로 늘 전망이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는 169개(지난해 9월 말 기준)에 이른다. 국민연금의 삼성전자(6.63%), 현대자동차(6.75%), 대한항공(9.61%) 지분율은 각 그룹 총수의 개인 지분율보다 높다. 또 국민연금은 포스코(6.81%), 하나금융지주(9.35%)의 최대주주(의결권 기준)다. 이 상태에서 주주권 행사를 법제화하면 국민연금은 ‘재벌 총수 중의 총수’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국민연금이 다양한 기업의 경영판단을 할 만한 전문성을 갖췄느냐다. 핵심 사안인 데도 이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휙휙 바뀌는 환경 속에서 기업은 신속한 투자결정을 해야 하는데, 국민연금이 이를 제대로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선 누구도 자신 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대신 지배구조, 경영권 승계와 같은 대기업의 민감한 사안을 정부와 정치권의 영향권 아래에 둘 수 있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게다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민연금의 파견 이사가 바뀌면 기업경영의 일관성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이 문제는 지난해에도 뜨거운 공방을 거쳤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지난해 4월 “거대권력이 된 대기업을 견제할 효과적인 수단으로 자본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가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 게 발단이었다. 재계는 당시 “정부의 입김만 커지는 부작용을 낳는다”며 반발했고, 정부도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가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를 공언하면서 주주권 행사가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한 것이다. 새누리당 진영 정책위의장은 “경제민주화를 종합적으로 논의할 때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 정책합의문’에는 이 문제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개정안이 즉시 통과될지는 불투명하다. 워낙 논란이 커 여야 모두에서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안종범 의원은 “지나치게 관치로 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어 신중하게 세부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이용섭 정책위의장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세부사안에 대한 논의를 거친 뒤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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