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령은 호텔 주방 도우미로 중령은 기숙사 야간 경비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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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호 01면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서울 제대군인지원센터. 3층 입구에 들어서자 ‘국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 호국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6월 호국보훈의 달’ 포스터가 붙어 있다. 복도엔 6·25전쟁 당시 의정부에서 105㎜ 야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격파하고 전사한 ‘6·25 전쟁영웅’ 김풍익 중령의 사진도 걸려 있다.

내일 한국전쟁 62주년, 호국보훈의 달에 막막한 전역 군인들

그러나 포스터와 사진 뒤에 보이는 현실은 안보를 책임졌던 전역 장교·부사관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취업난이었다. 이곳은 전역 군인들의 취업과 사회 적응을 돕는다. 안내실에 늘어선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구직 정보를 뒤지던 포병 출신의 김모(58·중령 예편)씨는 “33년을 국가에 충성하고 2005년 전역했는데 그동안 만난 거라곤 사회의 벽밖에 없다”며 “초등학교 보안관 자리를 찾고 있는데 줄이 너무 길다”며 답답해했다.

김씨는 “그래도 나는 전역 직후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예비군 대대장으로 5년 근무하는 기회를 가졌지만 요즘 전역하는 후배들을 보면 내가 미안할 정도다. 취업이란 게 하루가 다르게 더 어려워진다”고 한숨을 쉬었다.

보훈처에 따르면 2007년부터 5년간 전역한 중·장기 군 복무자(장교·부사관)는 2만9090명. 이들 중 취업자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만6269명(55.9%)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 가까운 전역자는 사실상 실업자다. 문제는 군의 특성상 전역 군인 대부분이 40~50대 가장이란 사실이다. 자녀 교육비와 내집 마련 등으로 많은 돈이 필요한 시기이나 사회에서 안정된 직업을 갖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육군에 따르면 정년 제한에 따라 전역하는 평균 나이는 대위 43세, 소령 45세, 중령 53세다. 오경준 보훈처 제대군인취업과장은 “44.1%란 비(非)취업자 비율은 세계적으로 찾기 힘든 대단히 높은 수치”라며 “선진 각국의 경우 90% 취업이 일반적”이라고 소개했다.

취업의 내용과 질도 높지 않다. 취업자 대부분이 월급 100만원대의 비정규직·단기계약직에 몰려 있어 ‘100만원 취업’으로 불린다. 서울 제대군인지원센터의 복장규 컨설턴트는 “시설 관리·경비 등의 저임금 단기계약직과 보험 등의 판매·영업직이 전역 장교·부사관들에게 기회가 오는 자리”라며 “아파트 경비직은 실수령액이 120만원 안팎”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군 전역자들의 취업난이 이들만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군 전반의 사기와 안보태세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육군 소령 B씨(41)는 “몇 년 전 미국 워싱턴에서 근무할 때 군복을 입고 사무실을 나서면 거리에서 미국인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땐 자부심이 컸는데, 요즘엔 퇴역이 곧 실업으로 연결되는 현실을 보면서 가족보다 나라가 우선이라는 믿음이 흔들릴까 두렵다”고 토로했다. 국방부에서 근무하는 중령 C씨는 “다들 어려운데 군만 볼멘소리를 한다면 곤란하겠지만 우리가 복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회와 기업이 전역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대한 직업군인 취업난의 최대 원인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일자리 전쟁에 있다. 그렇다 해도 최근 퇴역했거나 전역을 앞둔 장교들이 입학한 1970년대 말~80년대 육군사관학교는 엘리트의 산실이었다. 젊은 인재가 몰려 사관생도는 여대생에게 1등 신랑감으로 꼽혔다. 30여 년이 흐른 뒤 많은 장교와 부사관들은 재취업의 어려움에 몰려 중산층 탈락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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