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억2000만원' 신세계 61세 판매왕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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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여성복 ‘김연주’ 매장 매니저인 노정희씨(왼쪽)가 고객에게 옷을 권하고 있다. 여기서 20년 가까이 일하며 단골 200명을 둔 그는 “어떤 옷이든 보기만 하면 어울릴 고객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사진 신세계백화점]

이달 초 서울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점장실에서 회갑연이 열렸다. 주인공은 2층 여성정장 ‘김연주’ 매장의 노정희(61) 매니저. 점장인 황철구(53) 부사장과 매장 직원 20여 명이 모여 노 매니저의 생일을 축하했다.

 노 매니저는 신세계 본점의 입점업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 근무한 인물이다. 1993년 ‘김연주’가 이곳에 문을 열면서부터 매니저로 일했다. 그동안 백화점 점장이 11번 바뀌었다. 노 매니저가 처음 신세계백화점에 왔을 때 황 부사장은 매장관리 과장이었다.

 그러나 그저 오래 일했다고 신세계가 회갑연을 열어준 것은 아니다. 노 매니저는 소문난 ‘판매 여왕’이다. 입점한 디자이너 여성복 중 베스트3에 7년 연속 꼽히는 매출을 올렸다. 단골이 200명이다. 그중 50명은 20년 전부터 온 사람들이다. 황 부사장은 “매장 매니저들 사이에선 전설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노 매니저는 “메모 습관 덕분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70년대 고향 목포의 세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밀수로 적발돼 들어오면 그 내역을 기록하는 심의관이었다. 밀수 품목과 물품을 싣고 내린 장소, 물건이 발견된 곳을 비롯해 관련된 내용을 취조해 적었다. “세관에서 3년 동안 일하고 결혼하면서 그만뒀는데, 아이가 큰 후 백화점에 취업하면서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고 말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니만큼 메모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매달 50~70페이지짜리 노트 두 권을 메모로 채운다. 단골이 사간 옷과 취향은 물론 고객별로 꼭 수선해야 하는 부위, 나눴던 이야기까지도 기록한다. “잊어버릴까 봐 써놓을 뿐 머릿속에 거의 다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고객이 오면 “지난번 사셨던 옷과 잘 어울릴 만한 이 옷을 입어 보시라”고 즉각 권할 수 있는 밑천이다. 또 판매한 옷이 때가 탔겠다 싶을 때쯤엔 전화를 걸어 “꼭 드라이클리닝을 맡기시라”는 식으로 세심한 조언을 해준다.

 판매 여왕이 된 또 다른 비결은 ‘꼭 팔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고객과 손잡고 다른 브랜드 매장에 가기도 다반사”라고 말했다. ‘김연주’에 고객이 원하는 옷이 없을 경우다. “고객님과 꼭 어울릴 것 같은 골프웨어를 봐뒀다”며 같이 가기도 한다. “우리 매장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는 고객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은 욕심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관계를 쌓으면 언젠가는 단골이 되기 마련이다.

 그는 “20년 동안 유력한 인사의 사모님들 옷을 팔며 대한민국 역사·경제와 함께 연륜을 쌓은 듯하다”고 돌아봤다. ‘김연주’는 정장 한 벌에 100만원이 넘고, 보수적인 스타일의 브랜드다. 때문에 고위 공무원, 재계 유력인사의 부인들이 주요 단골이었다. 노 매니저는 “역대 대통령 부인 중 한 분이 우리 단골이었다”며 “영부인이 되기 전인 90년대 초에 매장에서 90만원짜리 옷을 보며 ‘이렇게 비싼 옷을 누가 입느냐’고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번 입어보고 ‘참 따뜻하고 가벼운 겨울정장’이라며 청와대로 직접 디자이너를 불러 옷을 맞춰 입었다”고 귀띔했다.

 10여 년 전엔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옷을 배달하기도 했다. “당시 총리 부인은 옷의 달인이었다”며 “옷을 한번 보면 어디를 줄이고 늘려 입어야 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리곤 했다”고 기억했다. 또 “이름만 대면 아는 기업 설립자의 부인은 50대 시절부터 옷을 입어 지금은 70대 노부인이 됐다” 고 말했다. 경기가 좋을 땐 고객들이 한번에 500만~600만원어치씩 옷을 사갔다. “94년 세일 행사에선 하루 1억2000만원어치를 팔았다”며 “신용카드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밤새 돈을 셌다”고 기억했다.

 그는 “요즘 매장에서 실감하는 불경기는 심각하다”고 했다. “한 달 이상 얼굴 안 보이는 분이 많고, 소득이 높은 사람도 쉽사리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때일수록 옷을 사라고 무리하게 부탁하기보다는 고객의 친구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은 노 매니저와 같은 장기근속 협력사원을 늘리고 있다. 6개월 이상 근무한 판매 협력사원 비중은 2009년 48%에서 올해 60%까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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