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새전을 챙기는 공직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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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논설위원

십수 년 전 일이다. 모 재벌총수와 거물급 정치인 몇 명이 비리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그 재벌총수는 재판 일정 중 실어증(失語症)에 걸렸다며 입을 다물었다. 피고인이었던 한 정치인이 재판에서 강하게 항변했다. “(거액은) 받았지만 대가성이 없었다.” 그는 덧붙였다. “그는 청탁도 하지 않았고, 나의 정치역정을 존경해 돕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재벌총수가 실어증이 나았다며 말문을 텄다. 정치인이 물었다. “내게 돈을 줄 때, 나를 존경해서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대가성은 없는 거지요?” 그러자 그 재벌총수가 ‘핏!’ 하며 일갈했다. “돈 줄 때야 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지….”

 최근 임혜경 부산시교육감이 유치원장 2명에게서 옷 선물을 받아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임 교육감은 “대가성이 없다”고 부인한다. 그런데 유치원장들은 이렇게 진술했다. “교육감과 친해지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심중까지 대가를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금품을 받았다가 걸리면 목을 매는 것이 바로 ‘대가성’이다. 받은 금품이 뇌물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이 바로 ‘대가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통상 공직자가 직무와 관련해 특정 이익이나 편의를 부탁받고 제공하는 경우다. 대가성이 없다면 돈과 향응을 받아도 무죄다. 지역 기업인들에게서 향응과 금품을 받고 기소됐어도 대법원에서 무죄확정판결을 받은 검사도 있다. 최근 6억원을 받고도 대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대통령 측근의 항변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가성을 검사가 입증하지 못하면 이들은 모두 무죄다.

 그런데 정말 대가성만 없으면 ‘죄 없음’이 맞는 걸까. 오래 전에 한 기업인과 만날 약속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장소를 바꾸자며 연락이 왔다. 바뀐 장소로 갔다. 얼마 후 식당 종업원이 계산서를 가져왔다. 그곳에서 자기 손님들을 접대한 한 국회의원의 계산서였다. 기업인은 밥값을 내라는 그 국회의원의 호출에 장소를 바꾼 것이다. 이런 관행을 행하는 일부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들이 있다. 소위 스폰서라고 한다. 고위 공직자가 되면 특강료도 수백만원이란다. 현행법상 불법도 뇌물도 아니다. 그래도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찜찜하고 불쾌하다.

 일본의 경제윤리학자 다케우치 야스오 교수는 이를 ‘증여의 정치학’으로 설명한다. 요약하자면 교환은 무색투명한 관계로 경제문제밖에 없다. 한데 금품이나 서비스가 한쪽으로만 이전되는 ‘증여’에선 경제영역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랑과 증오’ ‘지배와 굴종’의 영역으로 옮겨 간다. 즉 경제 문제에서 정치 문제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의 이론을 빌리자면 고위층에 주는 대가성 없는 금품과 향응은 ‘새전(賽錢)형 증여’로 설명된다. 새전이란 일본인들이 신령이나 부처에게 습관적으로 바치는 돈을 말한다. 새전을 내고 이익이나 복을 얻으면 좋고, 그보다는 이로써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액땜 용도가 크단다. 이는 신령뿐 아니라 높은 사람을 향해서도 같은 기대감으로 이루어진다. 동양권에선 이런 ‘새전형 뇌물’이 관습적으로 이루어져 죄의식도 없고, 인간관계의 비용 정도로 치부된다. 죄의식이 없으니 관행은 집요하게 살아남는다. ‘미움 안 받으려고’ 혹은 ‘나중에 도움을 바라고’ 바치는 새전이 진정으로 대가성 없는 금품일까.

 최근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공무원이 돈을 받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처벌하는 ‘우리는 남이다’ 법안의 입법을 추진하고 있단다. 친구가 주는 떡값도 안 된다. 김영란 위원장은 최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공무원 생활 어렵다며 돈 주는 친구가 다른 가난한 친구에게도 돈을 주느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반부패’ 관련 법이 모자라서 부패 관행이 반복되는 건 아니다. 이것도 또 하나의 입법안으로 그칠 수 있다. 하지만 이젠 신령이나 부처도 아니면서 받아 챙기는 새전형 뇌물, 처벌할 수 없는 그 오랜 관습을 끊어야 할 때다. 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