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때 이른 뉴저널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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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지휘자 애드리안 불트가 바그너 오페라 해석과 관련해 선배 지휘자 두 명을 비교한 적이 있다. 대상은 왕년의 명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시와 한스 리히터. 1970년대 초반 FM방송에서 간혹 듣던 음악가들이다.

"운명의 힘을 다룬 바그너의 '방황하는 화란인' 을 두 대가가 교대로 지휘를 했다. 분명 같은 곡이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의 지휘는 운명이 마치 우리를 집요하게 뒤쫓는 듯이 들리더니, 다른 이의 지휘봉은 '우리 앞을 덮쳐오는 운명' 을 들려주더라. "

지난 주 본란에서 나는 1960년대 서구의 뉴저널리즘을 언급하며, 탈(脫)객관주의 시대 신문제작의 문법이 어떻게 바뀌나 하는 소견을 일차 개진했다. 하지만 가치판단이 깊숙하게 개입되는 '뉴스 리얼리즘' 이라 해도 결국 신문은 신문이다. 따라서 지휘자마다 음악 해석이 변한다 해도 결국은 같은 재료(레퍼토리)를 다룬다는 점은 똑같다.

반면 뉴저널리즘의 패러다임은 하늘과 땅 차이만한 변화도 가능케 할 것이다. 이를테면 선거나 의약분업 같은 특정 현안 때마다 불거지는 편파보도 시비 같은 것이 장기적으로는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미국처럼 선거 때 신문별로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지지 천명행위가 비로소 가능하다. 논의가 투명해지는 것이다. 이 경우 독자들이 어렵사리 '행간' 을 짚어보아야 하는 한국적 현상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을 다룬다' '물 먹으면 안된다' 는 강박관념과 여기에서 오는 망라주의식 제작에서 벗어나는 결정적 기폭제이기도 하다.

사건기사는 물론이고 리뷰와 칼럼의 경우 엉거주춤한 중립주의 내지 양비론(兩非論)을 벗어던진 논의의 물꼬도 비로소 터질 것이다. 논의의 백화제방(百花齊放)속에서 '그 신문이 그 신문' 이라는 얘기도 옛말이 된다.

아쉬운 점은 당장 한국사회에 이런 뉴 저널리즘 도입은 시기상조다. 우선은 사회 분위기.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신문' 임을 거듭 강조를 해야 겨우 불이익을 면할 수 있는 현재와 달리, 다양한 관점이 수용되는 사회분위기 형성이 필수다. 기존의 속보경쟁에서 벗어나 어젠더 설정과 탐사보도 경쟁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신문 내부의 변화도 당연하다.

급한 얘기부터 하려는 마음에 지난번 예고했던 뉴저널리즘의 '인식론적 배경' 을 생략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주.객관을 칸막이했던 데카르트와 뉴튼식 패러다임을 무효로 만든 양자역학의 대두, 해석학과 현상학 같은 철학의 등장 등에 대한 포괄적인 성찰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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