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 인사이트] 재정부가 유로축구 8강서 그리스 응원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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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서경호
정책팀장

18일 김이태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과장의 눈밑은 거뭇했다. 그는 17일 저녁 출근해 직원들과 함께 밤새 그리스 2차 총선 개표를 지켜봤다. 재정부 국제금융라인은 국제금융센터와 함께 일요일인 17일 오전부터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밤낮 교대로 24시간 외신을 챙기고 분석했다. 덕분에 18일 오전 8시 신제윤 재정부 1차관 주재로 열린 상황점검회의에 보고서를 올릴 수 있었다. 김 과장은 “재정부가 다른 나라 총선 결과를 정당별 득표율까지 자세하게 실시간으로 분석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우방인 미국 선거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스 총선 전후로 봇물처럼 쏟아진 내외신 기사를 보면서 외환위기 당시 한국을 떠올린 이가 많을 것이다.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 혹독한 긴축을 감내했고,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착실하게 외채를 갚았다. 국제통화기금(IMF) 모범생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데 나랏빚 절반을 깎아줬는데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다시 협상을 하자고 나서는 그리스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총선 직전, 그리스의 옛 화폐인 드라크마(drachma)의 부활을 예상하는 이가 꽤 많았다. 그래서 뱅크런(대규모 자금 인출)이 있었다. ‘움켜쥐다’라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비롯된 드라크마는 원래 화살 한 움큼의 가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화폐 이름조차도 요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리스인은 국제금융시장을 ‘움켜쥔 사람들’이었다. 국내총생산(GDP)이 전 세계의 1%도 안 되는 그리스가 한국을 포함해 세계 금융시장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것은 유로존 붕괴라는 시스템 리스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가 나오면서 한국 증시도 올랐다. 재정부도 투자은행(IB)들의 분위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신민당·사회당 등 친(親)구제금융 그룹의 총선 승리로 불확실성이 해소돼 신흥국 통화·주식 등 위험자산의 단기 랠리가 예상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그리스 총선은 최소한의 불확실성 해소일 뿐 근본 문제들은 상존하고 있고, 구제금융 조건 재협상 가능성, 스페인 은행 구제금융 등 유로존 관련 불확실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재정부가 ‘신중 모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유로존 향후 일정에 따라 언제든지 시장이 춤출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19일로 예정된 스페인 국채 발행이 관심이다. 발행금리가 치솟으면 스페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차가워질 것이다. 20일엔 독일 의회가 신재정협약 승인 여부를 논의한다. 독일이 나서지 않으면 7월 1일 출범 예정인 유럽안정화기구(ESM)도 늦어진다.

 유로존 해법에는 이 같은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고생스럽고 더딘 길이 남아 있다. 답답했던지 휴일 출근한 은성수 재정부 국제금융정책국장은 “유로2012 축구에서 그리스가 극적으로 러시아를 이겼는데, 총선에 좋은 영향이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반쯤 농담이다. 좀 과장해서 보면 유로축구 8강 진출의 기쁨이 ‘배 째라’ 전략으로 나오던 그리스인을 다독여 친유로존 성향을 약간이나마 끌어냈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23일 8강전에선 하필이면(!) 독일과 그리스가 맞붙는다. 독일은 유로존 위기를 풀 실마리를 쥐고 있지만 언제나 기대에 못 미치는 해법을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주변국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유로본드 발행 같은 재정통합 강화 방안이 성사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김이태 과장은 “독일이 당장 재정으로 힘들다면 축구를 통해서라도 주변국을 좀 다독였으면 한다” 고 했다.

유럽안정화기구 유럽연합이 재정위기에 처한 회원국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약 5000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기금이다. ESM은 기존의 단기적인 구제에 그쳤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대체 보완하는 성격으로서 유로존 내 16개 회원국의 요청이 있으면 장기적으로 지원자금을 대출해 주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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