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사러간 母, 교복입은 딸 데려간 이유보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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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국세청 직원들이 한 해운업체를 세무조사했는데 서류 틈에 ‘아버지, 도저히 생활이 안 되니 몇백불만 더 보내줄 수 없나요’ 라는 하소연 편지가 섞여 있었다. 이를 우연히 발견한 조사요원은 ‘털어도 별것 없겠다’며 회사를 다시 봤다. KSS해운의 창업자 박종규 고문 이야기다. 자녀 해외유학 때 유학비를 짜게 줬다고 한다. 그는 1990년대에 바른경제동인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투명경영과 기업부패 줄이기 운동에 앞장섰다. 회사 경영을 2세가 아니라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내가 만나 본 훌륭한 부자들의 자녀교육은 단순히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저 쉽게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재산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 돈을 쓸 때는 써야 하지만 잘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중시한다. 부모 역할은 자녀에게 돈을 물려주기보다 돈을 지키고 키우는 기본 소양을 가꿔주는 것이다.

자수성가한 한 노인 부자를 보자. 가끔 찾아오는 손주들을 한 번은 최고급 음식점에, 그 다음번엔 허름한 감자탕집이나 백반집에 데리고 간다. 벤츠 타고 학원을 다니며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풍요롭게 자라는 손자·손녀에게 그들이 앞으로 더불어 살아야 할 서민의 삶을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각인해 주려는 뜻이다.

의사 아들·딸을 둔 한 산부인과 개업의는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독특한 발상을 했다. 자녀가 결혼하자 각각 아파트를 사주고 자신의 건물에 병원을 열도록 도와줬다. 그런데 아파트를 사주면서 대금의 절반인 수억원을 자녀 명의로 은행에서 대출받게 하고는 그 돈을 가져가 버렸다. “너희들도 의사니 스스로 벌어 갚으라”는 주문이었다. 자식들은 “그냥 알아서 집 구하라고 하시지…” 하면서 내심 서운해했다. 어쨌든 아들·딸 모두 열심히 돈을 벌어 꾼 돈을 다 갚았다. 그런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식 앞에 증권펀드 통장을 내밀었다. “당시에 내가 가져간 대출금은 전부 너희들 명의로 금융상품에 가입돼 있다.” 훨씬 큰 돈이 돼 있었다.

유통업으로 돈을 번 부자는 딸을 가난한 목사 아들에 출가시켰다. 신랑은 변변한 신접살림 한 칸 마련하기 힘들었다. 그 실업가는 사위에게 “돈을 빌려 줄 테니 차용증 쓰고 원리금 꼬박꼬박 갚으라”고 했다. 그는 꿔준 돈 액수만큼 딸과 사위 명의로 땅을 사 뒀지만, 아직 당사자들한테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필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돈 많은 장인이 꽤나 야박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인생을 만만하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어요”라고 털어놨다.

맨손으로 상경해 부동산 투자로 돈을 모은 한 여성은 서울 시내 건물을 살 때 고교생 딸을 데리고 다녔다. 딸은 창피했는지 사복을 입었지만 바쁠 때는 교복을 입은 채 어머니와 빌딩을 보러 다녔다. 처음엔 심드렁했지만 갈수록 눈이 반짝반짝 빛나게 됐다. 어머니는 매입한 상가건물 상수도관이 동파될까봐 매년 11월이면 해어진 옷들을 장롱에서 주섬주섬 모아 승용차 트렁크에 한가득 싣고 건물을 찾아다녔다. 낡은 옷가지로 일일이 상수도 계량기를 덮고 또 덮었다. 그 딸은 대학 진학 후에는 혼자 스스로 모친이 관리하는 빌딩을 찾아 돌보게 됐다. 이제 10년쯤 지나 어머니에 이어 두 번째 관리인이 된 딸은 월 수억원에 달하는 임대료 중 일부만 급여 명목으로 챙기고 나머지는 대부분 저축과 불우이웃 돕기에 할애한다.

60대 이상 자수성가한 부자 중에는 자린고비형이 많다. 하지만 40~50대의 젊은 부자들은 절약해서 돈을 모으기보다 사업을 하고 투자를 해서 돈을 버는 걸 강조한다. 절약형보다는 창조형이다.

내가 재직하는 대학의 학생들 이야기다. 딸에게 2000만원 든 통장을 건네 주며 “알아서 잘 굴려보라”고 한 학부형이 있다. 그 딸은 그 돈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어 친구와 함께 밤낮으로 서울 동대문 의류상가를 누볐다. 쇼핑몰 경쟁이 너무 치열해 몇 년 뒤 문을 닫긴 했지만, 비즈니스가 뭔지, 의류업종의 생리가 어떤지 산교육을 받았다. 지방 유지인 한 학부형은 딸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자 학기가 시작하기 직전인 2월에 함께 상경했다. 그는 이미 학교 근처의 아파트와 상가를 딸을 위해 하나씩 매입한 터였다. 그러고는 “이 상가와 아파트를 네게 줄 테니 대학 4년 학비는 네가 벌어서 충당하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혼자 뛰어든 것이 주택임대업과 장사였다. 아파트 방 3개는 지방학생들에게 월세를 놓고 자신은 마루에서 지냈다. 상가에선 팬시점·옷가게·음식점을 번갈아 가며 장사를 했다. 스스로 돈을 벌어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이제 졸업장을 받은 그는 곧바로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대학 4년 동안 직장에 취직하겠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주변 미혼남들에게서 데이트 신청도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부자 아빠의 창조형 교육 덕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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