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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는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5호 31면

내 인생에서 미술관 입장을 위해 네 시간가량 기다려 본 적이 두 번이다. 한번은 1993년 베를린 종합예술대학 유학시절, 세잔 회고전을 보기 위해 7시간 동안 밤기차를 타고 독일의 서남쪽 도시 튀빙겐을 갔을 때다.

독문학을 공부하다 뒤늦게 미술로 전공을 바꾼 나는 세잔을 왜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고까지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현대미술을 하겠다고, 멋진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세잔을 왜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었다.

그런데 입장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스위스 등 유럽 전역에서 세잔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낮 12시가 넘어 드디어 입장한 우리는 마감시간에 만나기로 하고 흩어졌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생 빅트와르 산’ 등 책에서만 보던 작품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느낌이 선뜻 오지 않더라도, 뚫어져라 하염없이 응시했다. 작품이 내게 말을 걸 때까지, 내 감각 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그렇게 몰입의 시간이 흘러 저녁 노을이 전시장을 물들일 무렵 비로소 나는 세잔의 지각(知覺)이 무엇이었는지, 그의 떨리는 손이 얼마나 성실한 관조의 눈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밤기차를 타고 달려와 고생하며 기다렸던 그날 하루는 내가 세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축복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기다림은 지난 5월 간송미술관에서였다. 봄가을마다 보름씩 열리는 특별전을 번번이 놓쳐 버린 것을 속상해 했던 나는 그날이 전시의 마지막 일요일이라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남편은 외출했고 모처럼 집에 온 큰 애에게 작은 애를 맡기기가 좀 미안한 분위기였다. 더구나 내가 사는 파주에서 서울 성북동까지는 가는 데만 두 시간, 그리고 가서는 4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니, 한 시간만 본다고 쳐도 저녁식사 전까지 돌아오기 어려운 일정이었다.

순간 포기하고 싶었지만 실은 한 달도 넘게 내 책상 위에는 겸재의 화집이 펼쳐져 있었다. 연필로 그의 구도를 스케치해 보기도 하고, 한참을 마냥 들여다보기도 한 터였다. 서둘러 서울행 좌석버스를 탔다. 비가 올 것 같다고 해서 가져간 우산을 지팡이 삼아 미술관 관람 대열에서 혼자 네 시간을 기다렸다. 다리에 쥐가 나는 것 같고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입장한 미술관은 황당하리만큼 의외였다. 미술관 안마당의 낡고 비좁은 우리에 갇혀 있는 공작새, 정리한 흔적이 없는 화분들은 그렇다 치자. 전시관 외벽의 칠은 벗겨졌고 갈라진 금도 여기저기 보였다. 종이 작품들은 습도·온도·조명 등에 민감하지만 2층 전시실 창문들은 변덕스러운 날씨임에도 열려 있었다. 밀려드는 인파에 직원들은 “작품 앞에 서 있지 마시고 빨리빨리 앞으로 움직이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휘청거렸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휘청거렸고, 무료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기에 급급한 미술관의 ‘완력’에 휘청거렸다. 작품을 ‘감상’하게 해주는 미술관의 원래 기능은 없었다. 차라리 입장료를 받더라도 관람객을 배려하고 작품 앞에 순전히 몰입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해 주길 바랐다. 겸재 작품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간절한 기대는 미술관의 이런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그 기습작전 같은 짧은 전시기간에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1층의 관람 대열에서 약간 비켜서서, 뒷줄에 밀리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안간힘을 쓰면서 보고 또 본 겸재의 ‘청풍계(淸風溪)’에서 정말로 푸르고 푸른 바람을 느끼지 못했더라면, 이날은 내게 참담함만을 기억하게 하는 슬픈 날이 되었을 것이다.



김혜련 서울대에서 독문학과 미술이론을 공부한 뒤 베를린 종합예술대학에서 회화실기를 전공했다. 베를린 공과대학 철학박사(예술학). 현재 작품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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