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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레즈가 연주하는 말러의 '대지의 노래'

중앙일보

입력

확실히 말러의 음악은 처음 듣는 순간부터 그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빼앗기곤 하는 쇼팽이나 모차르트와는 다르다. 물론 쇤베르크나 슈톡하우젠의 작품보다는 양호한 편이지만 말러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향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감상자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특히 가사가 붙어 있는 '대지의 노래'(원제 Das Lied von der Erde) 같은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말러 만년의 작품인 '대지의 노래'는 독일 시인 한스 베트게가 리타이포(李太白), 몽카오옌(孟浩然), 왕웨이(王維) 등 중국 당나라 시대 시인들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한 시모음집 '중국의 피리' 내용을 가사로 삼고 있다. 작품의 원작이 된 시의 내용과 말러가 당나라 시인들의 시를 자기 작품의 텍스트로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기까지의 심리적 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이 작품을 듣는다면 당연히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작품마다 창작자의 심리적 상태가 그대로 표출되는 말러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그 자체만을 놓고 평가하는 이른바 신비평류의감상법보다는 예술가의 주변환경이나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등을 작품이해의 주요인으로 삼는 역사비평류의 감상법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지의 노래'처럼 6개의 노래로 구성된 교향악곡 전체를 중국 시인들의 작품을 텍스트로 사용해 작곡한 사례는 서양 음악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이 작품이 서양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치를 잘 말해 주고 있다. 6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형식의 이 곡은 '제1악장-대지의 애수를 노래하는 술의 노래' '제2악장-가을에 쓸쓸한 사람' '제3악장-청춘에 대하여' '제4악장-아름다움에 대하여' '제5악장-봄에 취한 자' '제6악장-고별' 등의 제목이 붙어 있다.

작품의 형식은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테너와 알토 독창이 각 악장마다 번갈아등장, 인생의 유한함과 유구한 자연에 대한 관조를 노래하는 형태로 돼 있다. 60년대부터 말러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이름 좀 알려진 지휘자치고 이 작품을 녹음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대지의 노래'는 말러 특유의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말러의 사도'로 불리는 레너드 번스틴에서부터 말러의 제자이기도 했던 브루노발터,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클라우스 텐슈테트 등을 비롯, 오늘날에는 로린 마젤, 제임스 레바인, 사이먼 래틀, 주세페 시노폴리 등 많은 지휘자들의 녹음이 있다.

작곡가로 더 유명한 피에르 불레즈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내놓은 '대지의 노래'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추상화가 카시미르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연주라 할 만하다. 원래 '대지의 노래'는 테너와 알토가 부르는 것이 원칙이나 불레즈는 알토 대신 리투아니아 출신 메조 소프라노 비올레타 우르마나를 기용했다.

그 덕분인지 불레즈와 빈 필하모닉이 만들어내는 투명하고 명징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맞물려 알토보다는 다소 날카롭고 청아한 메조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감정의 과잉을 극도로 절제해 음의 정수만을 추출해낸 듯한 절대주의적 효과를 빚어낸다. '제1악장-대지의 애수를 노래하는 슬픔의 노래'를 연주하는 테너 미하엘 샤데의목소리도 유난히 맑고 날카로운 느낌이 든다.

번스틴이나 발터의 연주와 비교해 보면 감정의 풍부함이나 음색의 윤기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군더더기없는 오케스트레이션의 정제미나 성악과 기악 사이의 균형잡힌 구성미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뛰어나다는 느낌이다. 이런 연주가 말러의 의도에 부합하느냐 여부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방법이야 어찌됐든 말러가 의도한 것보다 더 뛰어난 연주를 들려 주기만 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가장 중요한 '제6악장-고별'의 경우 빈 필하모닉 주자들의 빼어난 기량과 우르마나의 청아한 음색이 조화를 이룬 불레즈의 연주는 단연 돋보인다. 음 하나하나의 미세한 표정까지도 조금의 흐트러짐이나 소홀함이 없이 빚어내는신즉물주의적 표현기법은 정말 황홀한 느낌을 준다.

현대의 뛰어난 디지털 기술로 뽑아낸 명징하고 맑은 음향도 발터나 텐슈테트 등의 오래된 명반에 비해 이 음반의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서울=연합) 정 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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