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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자유인 'e랜서' 전성시대

중앙일보

입력

일자리 구하기 어렵다는 요즘, 일부러 직장을 마다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명 e랜서. electronic freelancer의 준말이다. 사이버 공간의 자유 직업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인터넷으로 일을 수주(受注)하고 진행한다. 조직에 구속되는 것도 싫지만 직장생활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그 길을 선택한 이유다.
프리랜서들이 인맥을 통해서 일을 수주하고 오프라인에서 일을 진행하는 것과 달리 e랜서들은 인터넷을 통해 일감을 따낸다. 따라서 그들에게 지역성이란 없다. 미국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유럽에서 따낼 수도 있고, 국내에서 진행할 업무를 미국의 프로그래머에게 맡길 수도 있다.

실제로 세계 최대의 e랜서 마켓 플레이스인 미국의 이랜서닷컴(www.elancer.com)에서는 미국 내에서 진행되는 일 중 20∼30%를 인도나 러시아에서 수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직에 구속되는 것은 싫다

서울 신림동에 사는 김재경씨(29). 직장도 없고 명함도 없다. 하지만 그의 수입은 그 또래의 직장인들보다 훨씬 많다. 그가 하는 일은 프로젝트 매니저. IT분야의 일감을 따내 전체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웹사이트 구축에서부터 SI에 이르기까지 IT업계 일이라면 손대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다. 예전에는 주로 아는 사람이나 인맥을 통해 일을 했지만 요즘은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김씨는 e랜서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지난 해 하반기부터 e랜서 마켓플레이스인 e랜서(www.elancer.co.kr)에 회원으로 가입한 김씨는 이 사이트에서만 10여건의 일을 따냈고, 일부는 현재 진행 중에 있다.

매일 아침 인력시장에 나가 일감을 따내는 일반 노동자들처럼 그는 매일 인터넷에 열리는 ‘인력시장’에 나간다. 등록된 프로젝트에 대해 자신의 경력과 적정한 가격을 적어내고 공개입찰에 참여하는 것이다.

김씨는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 기획자 등으로 구성된 팀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대형 프로젝트를 따내려면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쪽 세계에서는 기획자,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등 각 부문별로 3∼5명씩 팀을 구성해서 일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일을 맡으면 스스로 기획을 해서 팀원들에게 업무를 분담해서 일을 진행시킨다. 팀 구성원 중에는 e랜서도 있고, 현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각자 떨어져 있지만 일 때문에 특별히 모이는 일은 많지 않다. 인터넷을 통해 작업과정을 체크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팀내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일들은 주변에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자바’가 필요하면 자바 전문가를 영입하고, ‘플래시’ 작업이 많으면 플래시 전문가를 영입한다. 그가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알고 지내는 프리랜서만 5백여명에 달한다. 어떤 일이든 따내면 진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바로 그런 주변 인맥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해본 경험도 있다.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맡을 경우 아예 몇 개월 회사로 들어와서 일해 달라는 부탁을 해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6개월을 넘겨본 적은 없다. 맡은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직장생활이 안정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조직에 얽매여서는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또 프리로 활동하는 것이 훨씬 수입도 많고 자유스럽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운영하는 팀을 기반으로 회사를 설립할 생각은 있지만 스스로 회사에 들어가 조직에 몸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e랜서로 활동하면서도 나름대로 정해진 규칙적인 생활패턴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도 피곤하고 정신도 나태해지기 때문이다.

출근하진 않지만 아침 7시면 예외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문도 보고 뉴스도 보며 정보를 챙긴다. 메일을 확인하고 인터넷을 통해 새로 나온 일감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 그리고 저녁 9시 이후 3시간 정도 일하는 시간을 잡아놓고 있다. 나머지는 사람들도 많나고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돈은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번다

매일 출근하지 않으면서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든 샐러리맨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최근 서울대 학생생활연구소가 서울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미래 직업에 관해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상자 중 20%가 앞으로 가장 인기있을 직종이 프리랜서라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현재 컴퓨터 관련학과 대학원생 중 상당수와 일부 대학 재학생들까지 e랜서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난 실력을 갖춘 ‘프로’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대학 휴학중인 이현철씨(24)는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e랜서 중 한명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한 그는 대학입학 때부터 줄곧 학업과 병행하면서 프리로 일을 해왔다.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대학원 선배들이 소개해주는 일을 주로 했다.

한창 일거리가 많던 99년 무렵에는 월 1천만원 정도는 거뜬히 벌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때에 비해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벤처기업들이 많이 어려워졌고, 또 요즘은 국문과나 영문과 출신들도 웹 프로그래밍 같은 분야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이라고 해도 단가는 10%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 하지만 아직도 돈은 직장인들보다는 많이 벌고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장담이다.

한때 그는 주변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직접 회사를 창업하고 기술연구소 부장이라는 직책으로 1년여간 외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주 신분만 유지한 채 회사일은 정리했다.

“프로그래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가 있고, 그 분야에 대해서만 일하고 공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직장에 몸담고 있으면 때론 하기 싫은 분야의 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시 ‘프리’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e랜서로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책상 앞에 앉아서 프로그램만 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는지, 해외의 기술동향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 ‘조직’은 떠나 있지만 인맥은 중요하기 때문에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대화를 통해 최근 추세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워낙 변화가 빠른 분야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프로그래밍 기술이 어느새 금방 사양화되고 단가가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지만 사회적 신분은 ‘실업자’

국내에서도 아웃소싱에 대한 효율성이 증명되면서 e랜서를 이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2∼3개월 짜리 단기 프로젝트나 부분적인 데이터베이스 수정을 위해 별도로 인력을 뽑는다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비용적으로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국내 e랜서 시장은 이제 초창기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에 따르면 기업들이 고정인력보다 e랜서를 활용하는 사례는 많이 늘어나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e랜서라는 직업은 불안정하다. 20대 젊은층들의 한때 아르바이트로 인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유로운 신분과 많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신분은 ‘실업자’로 인식되는 문제도 있다. 실제로 직장인이 누릴 수 있는 복지혜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으며, 카드발급이나 대출 등 은행 거래에서도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랜서 마켓플레이스를 운영하는 소리넷 커뮤니케이션의 이창섭 팀장은 “e랜서들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회사 차원에서 은행이나 보험회사 등과 연계해 이들의 경제적 신분 보장을 위한 방법들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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