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정치, 정녕 일본을 따라가는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오영환
국제부장

일본 정치를 보면서 늘 떠올리는 것은 1994년 대장성(재무성) 전직 사무차관의 한마디다. ‘관료의 속내는 대중 민주주의는 잘못이라는 신념일지 모른다.’(『관료』, 닛케이) 자민당 일당지배의 55년 체제가 깨지고 비(非)자민 연정이 들어섰을 때였다. 자민당과 2인3각으로 전후 일본을 이끌어온 거대권력 관료 집단의 오만과 엘리트주의, 위기 의식을 이보다 극적으로 나타낸 표현이 있었을까. 18년이 흐른 지금, 일본의 엘리트 관료들은 같은 생각에 젖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이즈미 총리 이래 정권이 여섯 번 바뀌는 단명내각을 대하고 있다. 2009년 정치 주도론을 내건 민주당 집권 후론 정책결정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일본만큼 정치 리더십 적자(赤子)가 큰 나라도 없다. 총리 권한이 대통령제의 행정수반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데서 6년간 총리 평균수명이 약 1년이다. 각료의 임기는 말할 것도 없다. 하토야마·간 내각 때의 평균 임기는 8.7개월이었다. 거꾸로 올해 38회째의 G8(G7 포함) 정상회의 참석자 수를 보자. 현 노다 총리는 일본에서 19번째 정상으로 참석했다. 독일(메르켈)·프랑스(올랑드)·미국(오바마)은 4, 5, 7명째였다. 내·외정에서 일본 총리의 존재감은 엷어졌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정치 표류의 기록이기도 하다. 일본 1년, 한국 5년, 중국 10년의 정치권력 임기가 한·중·일 삼국지의 현주소일 수 있다.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로 여론이 세포분열하고, 권력이 실시간으로 감시당하는 세상에서 정권의 적정 임기는 국가쇠퇴 방지의 새 조건일지 모른다.

일본 정치의 무기력증은 어디에서 오는가. 열흘 전 서울에서 만난 와카미야 아사히 신문 주필의 주된 포인트는 양원제(중·참의원)의 덫이었다. 참의원의 힘이 커진 데다 여소야대가 된 점을 들었다(총리 지명·예산은 중의원의 의결을 따르지만 법안 성립엔 양원의 동시 가결이 필요하다). 의사결정이 늦춰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총리는 중·참의원 선거와 당 대표 경선을 통해 심판을 받는다. 장기 집권하기엔 지뢰밭 투성이다. 하드웨어론에 무게를 둔 진단이었다. 반면 미국 굴지의 일본 전문가인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정치 지도자의 국가목표 설정 무능력과 정당의 인재 수혈 실패를 근본 원인으로 꼽았다(월스트리트저널 5월29일자). 소프트웨어 중심론이다.

후자에 초점을 맞춰 보자. 일본 정치에서 거대 담론이 사라졌다. ‘소득배증론’(이케다 총리)' '일본열도개조론(다나카 총리)’ '전후정치 총결산(나카소네 총리)'은 전후의 시대정신이었다. 성장과 자신감을 상징한다. 『언덕 위의 구름』의 일본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의 수필 ‘이 나라의 틀(この國のかたち)’의 울림도 컸다. 86년부터 타계 때까지 10년간 월간 문예춘추에 기고한 글이었다. ‘이 나라의 틀’은 정계를 압도했다. 국가론이 줄을 이었다. 오자와 신생당 대표간사(전 민주당 대표)의 보통국가론(93년), 다케무라 신당 사키가케 대표의 ‘작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나라’(94년)는 그때 나왔다. 소선거구제 도입을 통한 양당제 구축·국제공헌(오자와)과 8개주 연방제와 환경주의(다케무라)가 선명한 대비축을 이뤘다. 신보수주의·대국주의 대 자유주의·소국주의다. 자위대의 해외 파병과 민주당 집권으로 오자와의 비전은 실현됐고, 지방 분권화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 나라의 틀’은 나카소네 전 총리가 저서나 강연에서 애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의 등신대 경제공헌론(하시모토 총리), 부국유덕(富國有德·오부치 총리)은 임팩트가 작았고, 국가 비전은 화두가 되지 못했다.

국가론, 백년대계론이 없다고 정치가 표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자리를 정치 공학과 전례 답습주의, 대증(對症) 요법이 메우고 있다면 문제다. 일본 정치는 이 늪에 빠져 있는 듯싶다. 한국 정치도 거기서 거기다. 울림이 아닌 고십의 정치가 무성하다. 혼돈과 대분열의 시대, 정치인은 꿈과 비전을 얘기하고 그에 도전해야 한다. 저성장과 긴축의 시대, 성장의 분배가 아닌 고통의 분담을 호소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정치의 본령이자 책무다. 올 대선은 백년의 나라 틀을 찾아내고, 정치를 재발견할 좋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