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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블록버스터 '풍요속의 빈곤'

중앙일보

입력

10일 개봉하는 ‘광시곡’은 한국영화계에 일종의 경고등과 같다. 최근 급속하게 성장한 우리 영화의 뒤안을 생각하게 한다. 30억원이란 큰 돈을 들였으면서도 돈을 쓴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영화에 대한 치밀한 준비와 열정 등이 부족한 느낌이다.

지난해 ‘비천무’ ‘싸이렌’ ‘단적비연수’가 개봉되면서 영화계에서 일기 시작한 이른바 ‘한국형 대작’의 문제점을 새삼 반성하게 한다. 엉성한 구성과 설득력 없는 줄거리 등.그 이유는 무엇일까. ‘광시곡’을 중심으로 한국영화계의 구조적 취약성을 알아본다.

◇ 눈 먼 돈이 넘친다="돈이 없어 영화를 못 찍는 일은 없다." 요즘 충무로에 회자되는 말이다.

영화는 터지면 크게 터진다는 생각에서 각종 펀드.벤처자본이 밀려들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풍부한 자금이 영화 제작에 대한 프로의식을 희박하게 하고 있다.

혹시라도 남의 돈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안이한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광시곡' 도 제작비의 많은 부분을 일반 펀드에 의존했다.

제작사측은 3년여의 기획기간을 내세우지만 과연 그토록 오래 고민했는지 공감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다.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감독과 스태프를 큰 영화에 투입하는 것도 무리수로 지적된다.

'싸이렌' (이주엽 감독) '단적비연수' (박제현 감독) '광시곡' (장훈 감독) 모두 신인이 연출했다. 신인이라고 실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의 일관성을 주도해가는 뒷심이 부족한 편이다. 제작자 입장에선 감독을 통제하기에 유리할 수 있으나 대신 이들 영화는 전후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 잡으려는 토끼가 많다= '광시곡' 은 일단 얘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대(對) 테러부대를 그리고 있지만 느슨한 시나리오 탓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또 너무 많은 것을 노린 까닭에 영화의 색깔이 불분명하다. 액션인지, 멜로인지 미스터리인지, 분간이 어렵다.

'싸이렌' '단적비연수' 등이 액션과 멜로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성격이 모호한 영화로 끝났듯이 '광시곡' 또한 신파적 멜로와 서너 차례의 액션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양상이다.

테러부대원이 국가기밀을 훔쳐내는 과정, 그 사건을 둘러싼 정치권 고위인사와 특수부대장의 대립, 주인공으로 나오는 특수부대 부팀장(장동직) 과 그의 집에 데려다 키운 눈 먼 여동생(박예진) 의 지순한 사랑 등이 잘 어울리지 못한다.

어느 한 부분에도 자신이 없는 듯 예전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장면을 단순 나열한 것처럼 보인다.

접시 한그릇에 많은 재료.양념을 섞어 놓았으나 정체 불명의 요리가 만들어진 꼴이랄까. 그런 까닭에 극중 인물도 전혀 생동적이지 않고 한편의 캐리커처 같은 인상을 준다.

영화평론가 이효인씨는 "우리의 색깔을 담는다는 영화의 문화적 성격과 튼실한 구성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영화의 상품적 성격 두 가지 모두에서 실패한 영화들이 늘고 있다" 고 꼬집었다.

◇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문제는 이들 영화가 최근 한창 불고 있는 한국영화 열기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현란한 홍보문구와 물량 위주의 마케팅 전략으로 관객을 현혹하다 보면 우리 영화에 대한 신뢰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이 적지 않다. 우화 '늑대와 양치기' 같이 말이다.

영화사는 최근 급증한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탄탄한 배급망을 타고 초반 관객 동원에 성공하고, 또 비디오 판권 등으로 어느 정도 수익을 올릴지 모르지만 우리 영화의 장기적 발전 측면에서 걸림돌이 될 확률이 크다.

지난 2년간 40%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기록한 한국영화계의 체력 자체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시네월드 이준익 대표는 "할리우드 영화에도 수작.졸작이 있듯 한국영화에서도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으나 최근 국내 영화시장은 들떠 있는 게 사실" 이라며 "좋아진 제작환경을 완성도가 충실한 작품으로 보답하는 데 영화인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한다" 고 강조했다.

대기업들이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IMF 이전 상황이 되풀이돼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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