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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27> 정선 동강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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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뼝대가 벽처럼 서 있는 동강에 가족이 보트를 타고 낚시를 나왔다. 제장마을 뼝대 앞에서.

강을 따라 걷는 건, 바다를 따라 걷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다.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 망망대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희망을 품는 일이라면, 강을 따라 걷는 것은 팍팍했던 우리네 삶을 추억하는 일이다. 그 강이 동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동강은, 워낙 여러 물길이 합쳤다 갈라져서 그런지 51㎞에서 65㎞까지 자료마다 길이가 다르다. 영월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강이 동강(東江)이고 서쪽에 있는 강이 서강(西江·평창강)이라지만, 동강을 기록한 옛 문헌에 ‘오동나무 동(桐)’자를 쓴 자료가 있어 이도 믿을 바가 못 된다. 그러니까 동강은 길이도 이름도 제멋대로다. 이 산에 치이고 저 산에 밀려 꿈틀대고 비틀대며 물을 밀어내는 동강다운 내력이다.

동강을 걸었다.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산자락을 어지러이 휘감고 돌아가는 동강을 따라 걸었다. 모래밭 밟고 자갈밭 디디며 동강 물길을 따라 걸었고, 꾸역꾸역 산을 올라 동강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물이 말라 부쩍 수척해진 동강을 바라보며 한때는 흥청거렸던 물길을, 그 물길에 기대어 살던 삶을 생각했다. 동강을 걸었다. 아픈 건 발이 아니라 가슴이었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첩첩산중 후벼 파듯 지나가는 동강 물길

칠족령에서 연포마을 내려가는 길. 뼝대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 하늘다리.

동강은 강원도 심심산골, 그것도 산세가 험하다는 정선~평창~영월을 흐르는 강줄기다. 특히 정선을 지나는 동강은 비경 중의 비경을 자랑한다. 예부터 ‘정선 하늘은 세 뼘’이란 말이 내려온다. 정선 땅이 그만큼 첩첩산중이란 뜻이다. 그 첩첩산중을 동강이 후벼 파듯이 지난다. 동강 물길 앞에 붙는 상용 어구들, 이를 테면 구절양장(九折羊腸)이나 궁궁을을(弓弓乙乙) 같은 어휘가 동강의 형상을 고스란히 표현한다. 동강을 걷는 일은, 우리 강산의 가장 깊숙한 오지를 헤집는 일이다.

정선 사투리에 ‘뼝대’라는 낱말이 있다. 시인 황동규도 종종 ‘뼝대’라는 시어를 구사하곤 했는데, 굳이 표준말로 바꾸면 ‘절벽’ 또는 ‘벼랑’이란 뜻이다. 하나 온전한 해석은 못 된다. ‘뼝대’라는 단어에는 정선 사람들의 시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정선의 산은, 앞서 말한 대로 켜켜이 포개져 있다. 한데 산줄기가 경사를 이루지 않고 직각으로 꺾여 낭떠러지를 이룬다. 하여 산 아래에 사는 정선 사람들에게 산은 산이 아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다. 뼝대라는 말에는 절벽 아래에서 절벽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인생의 막막한 심정이 얹혀 있다. 동강을 걷는 건,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한 제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30년 가까이 주막을 했다는 연포마을 이향복 할머니 집. 개 한 마리만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동강은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성지다. 1996년 수자원공사가 영월댐(소위 동강댐) 건설을 추진했을 때, 전국에서 환경단체가 모여들어 공사를 막았다. 그리고 2002년 댐 건설 사업은 백지화됐다. 정부와 시민단체가 충돌했던 사례 중에서 이례적으로 시민단체가 승리한 경우다. 그건 전적으로 동강의 환경적인 가치 덕분이었다. 전 세계에서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에만 핀다는 동강할미꽃, 영구 보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룡동굴의 가치가 동강댐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동강 주변에는 현재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호사비오리·조롱이·수리부엉이 등 조류 92종, 천연기념물인 어름치 등 어류 32종,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수달·산양·하늘다람쥐 등 포유류 41종 등이 서식하고 있다. 동강을 걷는 일은, 우리나라 야생 생태계 최후의 보루를 탐방하는 일이다.

뗏꾼 기다리던 1000여개 주막 지금 어디에

소사에서 본 고라니. 첩첩산중에서 마주친 사람이 낯설었는지 재빨리 도망쳤다.

동강을 알려면 ‘떼’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떼’는 뗏목 또는 떼돈의 ‘떼’다. 여기서 뗏목과 떼돈의 ‘떼’는 같은 말이다. 서울이 수도가 된 조선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강원도 일대에서 벌채한 목재가 한강을 따라 서울 광나루까지 운송됐다. 강원도 곳곳에서 수집한 목재가 모이는 길목이 정선군 북면에 있는 아우라지였다. 송천과 골지천이 몸을 풀어 조양강이 되는 기점이다.

여기서부터 떼꾼이 뗏목을 타고 한강 천 리 길을 내려갔다. 물이 들면 정선에서 서울까지 닷새, 물이 빠지면 한 달 가까이 걸렸다. 그렇게 한 번 서울을 다녀오면 떼꾼은 큰돈을 벌었다. 정선군수 월급이 20원이던 시절, 정선에서 떼 한 바닥 타고 갔다 오면 30원이 손에 들어왔다. 그래서 ‘떼돈’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나 떼돈은, 떼꾼이 제 목숨을 강물에 담보로 맡긴 대가였다. 특히 정선과 영월에는 수많은 떼꾼의 목숨을 앗은 악명 높은 여울이 여럿 있었다. 떼꾼이 목숨과 바꾼 떼돈을 노리고 정선부터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까지 1000개가 넘는 주막이 늘어섰다. 떼꾼은 떼돈을 벌었지만 술과 여자와 투전으로 탕진하기 일쑤였다. 그 떼꾼의 애환이 정선아라리의 서글픈 곡조로 남아 있다.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지어 놓았네/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놓게//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높아라’. 황새여울과 된꼬까리는 평창과 영월에 있는 악명 높은 여울 이름이고, 만지산 전산옥은 영월에 있던 유명한 주모 이름이다.

지금 동강에 뗏목은 더 이상 뜨지 않는다. 흥청거리던 주막도 다 없어졌다. 물에 길을 내고, 물을 길 삼아 살던 인생도 이제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무심히 흐르는 동강과 동강을 닮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정선아라리의 애달픈 가락뿐이다.

칠족령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동강 물줄기. 동강 12경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풍경이다.

‘선생 김봉두’ 무대 연포마을엔 7가구 옹기종기

동강 물길 150리 중에서 가장 동강다운 구간을 골랐다.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일대, 제장마을에서 바세·소사를 거쳐 연포마을까지의 길이다. 제장에서 칠족령을 올라가 뼝대 위를 걸어 연포로 내려온 뒤 연포에서 동강을 따라 소사를 지나 바세까지 걷었다. 직선 코스로 6㎞ 남짓한 거리지만 강변을 거슬러 올랐다 내려온 거리를 합치면 10㎞ 가까이 된다.

동강이 날카로운 골을 돌아 나와 덕천리에 진입하면 제장마을을 시작으로 소사·바세·연포마을을 차례로 만난다. 이 마을은 모두 동강 너머 붉은 뼝대를 마주하고 있다. 네 마을 모두 나루를 두고 있었고, 제장·바새·연포 세 마을에는 떼꾼을 기다리던 주막이 있었다. 예전엔 제장과 연포를 들려면 줄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지만,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다.

연포마을은 겨우 7가구가 모여 사는 오지마을이다. 하지만, 마을 안에 학교가 있다. 아니 있었다. 지금은 폐교가 된 예미초교 연포분교다. 영화 ‘선생 김봉두’를 여기서 찍었다. 연포마을에 가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연포마을에서 30년 가까이 주막을 운영했던 이향복(84) 할머니다.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주모라는 얘기에 수소문해 찾아갔지만, 할머니는 감자밭에 나갔는지 없고 개 한 마리만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칠족령에 올랐다. 칠족령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동강 12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장관이다. 물길이 거의 360도 각도를 이르며 산을 포위한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장면이었다. 발 아래에서만 동강은 세 번 몸을 크게 뒤틀고 있었다. 이리 비틀고 저리 꺾이며 어떻게든 제 한 몸 건사하려는 동강의 몸짓이 안쓰러웠다. 하나 사람 사는 꼴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터다.

칠족령을 오르려고 제장으로 들어왔지만, 발 아래 보이는 마을은 소사와 바세마을이다. 물길이 한 번 더 돌면 산 너머에 연포마을이 있다. 제장에서 시작한 뼝대 길은 연포에서 끝난다. 연포로 내려와 소사를 지나는데 고라니 한 마리가 눈앞에서 꽁무니를 뺐다. 그래, 여기가 동강이었다.

동강을 걷는 건, 맑은 물빛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일이다. 연포마을에서 바라본 소사마을 동강변.

 

길 정보=동강길이라는 이름의 트레일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와 강원도청이 지정한 산소길에 동강길이 있다. 그러나 week&이 걸은 길은 정부 기관의 동강길과 다른 길이다. 정부 기관이 지정한 동강길은 동강을 바투 끼고 있지 않다. 두 동강길 모두 귤암리에서 고성리까지 포장도로를 고집한다. week&이 걸은 동강길은 되레 칠족령 뼝대 트레킹에 더 가깝다. 제장에서 칠족령 오르는 길은 이정표가 잘 나 있다. 넉넉잡아 네 시간이면 제장에서 연포까지 갈 수 있다. 정선군청(jeongseon.go.kr) 문화관광과 033-560-2369. 걷기여행 전문 승우여행사(swtour.co.kr)가 이달 16, 17, 21, 23, 27, 28일 당일 여정으로 동강길 걷기 상품을 운영한다. 제장나루~칠족령~연포마을~소사마을을 걷는다. 4만1000원. 02-720-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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