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종북의 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이후 북한을 다녀온 친북 성향의 통일운동가들 사이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방북 과정에서 만난 북송 비전향 장기수와 관련한 얘기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6·15 공동선언에 따라 같은 해 9월 북한으로 보내진 비전향 장기수는 모두 63명. 이들은 남한에 있을 때 자신들을 돌봐준 통일운동가들과 반갑게 재회했다. 그러고는 “김정일 장군님이 현대식 살림집도 마련해주고 가정도 꾸리게 해줬다”며 북한 안내원들이 보는 앞에서 체제 찬양을 했다. 하지만 헤어질 때쯤에는 몰래 쪽지를 쥐여주거나 귀엣말을 하는 방식으로 소통했다. 남쪽에 남겨두고 온 동료 장기수들에게 은밀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뜻밖에도 “북으로 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북송된 장기수들은 판문점에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컬러TV와 냉장고 등이 갖춰진 문화주택이 배정됐다. 노동당은 70~80대 고령 장기수들을 젊은 여성들과 결혼하도록 했고 늦둥이도 낳았다. 당시 총리였던 홍성남은 환영연에서 “청춘도 사랑도 미래도 고스란히 바쳐 혁명위업의 승리를 과시하고 돌아온 애국투사”라고 말했다. 장기수 대표는 “전향 않고 30~40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위대한 노동당과 조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화답했다. 그런데 왜 추가 북송 채비를 하던 남한의 동료들에게 ‘오지 말라’는 기별을 띄운 것일까.

 그들이 평양으로 돌아간 뒤 목도한 북한의 현실은 오매불망 그리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었다. 모든 인민을 잘살게 하겠다던 이상은 소수의 노동당 간부와 권력층 외에는 다 같이 굶주리는 균빈(均貧)의 세상이 됐다. 수풍발전소의 전기를 끊으면 남한이 암흑천지가 되고, 컬러TV 방송도 남한보다 6년 먼저 했다는 사실 등은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수령독재 속에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이 짓밟히는 세상은 그들이 청춘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이상향이 아니었다.

 자유분방한 남한 사회에서 건너간 이들을 옥죄기 시작한 북한 당국의 감시망도 장기수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다고 한다. 일부는 북송 뒤 남한 생활상을 언급하거나 대중강연 동원 등에 비협조적이란 이유로 뒤탈이 난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사실 북한에 비전향 장기수는 김영삼 정부 때 북송된 이인모(2007년 사망) 한 명이면 족했다. 34년을 복역하면서 김일성을 버리지 않은 이인모를 북한은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치켜세우며 체제 찬양과 대남 비난 소재로 충분히 활용했다. 정부 당국자는 “63명 집단 북송은 북한에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28명의 장기수 추가 북송이 검토됐으나 북한이 미온적이었다는 얘기다. 수십 년 옥고 속에 북송의 꿈을 이루고도 ‘북으로 오지 말라’는 북녘의 장기수들. 그런 전갈을 받아 든 남한의 장기수. 평생을 바쳐온 종북 행보의 허망한 끝을 본 그들은 요즘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종북 논란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